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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평화 밝히는 촛불로
2003-06-13
자주·평화 밝히는 촛불로 지하철을 타려고 역 구내에 들어서자 큰 포스터가 눈앞으로 확 달려든다. ‘촛불의 힘, 당당한 내 나라 촛불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6·13 효순·미선 1주기 추모대회 국민준비위원회가 주관하고 서울지하철공사 노조가 후원하는 촛불시위가 오늘 있을 것이라는 포스터였다. 그러고 보니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목숨을 잃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두 어린 영혼은 지금 어디서 안식하고 있을까. 작년 6월 13일은 평일(목요일)이었지만 지방 보궐선거일로 학교가 쉬었다. 둘은 오전 10시45분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생일 잔치에 가기 위해 흥겨운 마음으로 갓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 길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였다. 둘은 느닷없이 나타난 미군 궤도차량의 오른쪽 궤도 부분에 치였는데, 궤도차량을 몰던 미군은 그 사실을 모르고서 둘의 몸을 그대로 치고 지나갔다. 중학교 2학년생인 효순이와 미선이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을 테지만, 비명을 질러 구원을 청할 새도 없이 온몸이 무거운 쇳덩이에 깔렸다. 미군측은 마주 오던 궤도차량과 교차하기 위해 갓길 쪽으로 붙여 진행하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이라 한다. 조심성 없이 차량을 몰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사고를 낸 것이다. 주한 미군은 사고가 나자 미8군 명의로 조의를 표했다. 언뜻 보면 이전과 달리 성의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미합동조사반을 구성해 합동조사를 한다고 해놓고는 현장조사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유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그때서야 다시 오후 8시에 현장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가보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보이지도 않는데 그 자리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의 책임 회피만 강조했다. 한국 사법부가 배제된 재판에서 궤도차량에 타고 있던 병사를 비롯해 모든 책임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미군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재판을 받거나 유죄선고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세상에는 상식이란 것이 있고 인지상정이란 것이 통한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사람의 도리지만 그것을 안 지켰기에 촛불시위가 번진 것이다. 촛불시위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갔다. 월드컵대회를 치르면서 붉은 악마의 힘을 세계 만방에 알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였다.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땅의 평범한, 혹은 비범한 사람들의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 종묘공원, 부산 서면 태화백화점 앞, 대구 미군기지 ‘캠프 워크’ 앞, 광주 전남대 후문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 밖에도 전주·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추모 집회가 열렸다. 범대위 방미투쟁단(단장 한상렬 목사)은 지난해 12월 5일, 워싱턴 백악관 앞과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가 열리는 국방부 청사 앞에서 주한 미군 범죄 사진전을 열고 폭설 속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군 무죄 평결에 대한 분노는 국외 유학생과 교민에게까지 번졌고,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스웨덴 등 유럽 곳곳에서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어쨌거나 그것은 고의가 아닌 사고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고는 늘 일어날 수 있다. 크든 작든 사고가 나면 그 원인을 규명해 과실이 있으면 벌을 받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해주는 것이 사람 사는 동네의 정당한 일 처리 방식이다. 그런데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소파)에 따르면 미군측에만 재판권이 있고, 우리나라는 수사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주한 미군측의 일방적인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그 어떤 미군 범죄도 진실을 가려내기가 몹시 어려운 실정이다. 두 여중생의 가엾은 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조사와 재판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확실히 밝혀야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열기가 한·미 간에 갈등의 심화시키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면 우려할 만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효순이 미선이 1주기를 추모하고자 하는 자주평화실현 촛불대행진 행사가 정말 말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촛불행진을 강압적으로 막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기회에 한·미관계가 재정립된다면 두 아이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조금 시끄럽더라도 두 어린 영혼이여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이승하 (중앙대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3. 6. 13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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