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라는 말은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다. 모든 인간이 다같이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다를 뿐 아니라 다양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설혹 같은 자질을 갖고 태어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개개인의 성취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 남들보다 우수해지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약간의 게으름으로 인해 뒤처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차이는 미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런 차이로 인해 개개인에 대한 보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차별화가 없다면 어느 누가 구태여 열심히 노력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평등’이라는 말이 거의 절대적 위력을 가진다. 교육·의료는 물론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정도 차이는 있으나 평등이 활개치고 있다. 이중에서도 교육의 평준화는 가히 압권이다. 학생들은 자질이나 학업성취도에 관계없이 어떤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학교에 배정된다. 전혀 이질적인 아이들이 같은 반 같은 시간에 똑같은 수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소위 교실붕괴가 일어나고 돈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낸다. 그만큼 돈이 없는 부모는 사설학원이 밀집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가야 하고 그보다 형편이 더 나쁜 부모는 가슴만 두드려야 한다.
이 같은 교육평준화를 절대진리인 양 믿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창호가 단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아이와 바둑강의도 듣고 연습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또 박세리에게 골프 배운 지 한 달 된 아이와 골프연습을 하라고 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공부도 이와 똑같다.
이미 오래 전 영국의 경제학자 로이(Roy)는 간단한 수학적 모형을 이용해 임의로 직장을 배정하는 것이 개개인 스스로 직장을 선택하게 하는 것에 비해 소득수준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 불평등성을 더욱 심화시킴을 증명했다. 임의배정이 평등이라 생각하면 평등의 끝은 더 큰 불평등이라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결과 뒤에 숨은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게 되면 더욱 노력하게 돼 평균적으로 모두의 소득이 올라가고 그 결과 소득격차도 줄기 때문이다.
교육평준화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자질이나 학업성취도를 무시한 임의배정은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오히려 교육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돈 많은 부모의 자녀와 돈 없는 부모의 자녀 간의 교육불평등이 교육평준화로 인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사랑이 유별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급속한 변화를 거듭해 온 우리 현대사를 생각할 때 교육이 가장 현명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즉 교육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가장 안정적일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리 평준화를 강요해도 교육열이 식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기유학열과 대치동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살고 있는 동네에 따른 무차별적 학교배정이라는 공권력의 횡포가 지속되는 한 결국 시장이 공교육을 대체할 것은 자명하다. 교실이 무너져 사설학원은 날로 번성하고 심지어 외국학교가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와중에 무너진 교실에 남게 될 아이와 교실을 떠날 수 있는 아이간의 교육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됨도 물론이다.
이제 제발 공부 잘하는 아이는 공부 잘하는 학교에, 노래 잘하는 아이는 노래 잘하는 학교에 갈 수 있게 하자.
평준화의 끝은 불평등이다
‘평등’이라는 말은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다. 모든 인간이 다같이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다를 뿐 아니라 다양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설혹 같은 자질을 갖고 태어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개개인의 성취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 남들보다 우수해지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약간의 게으름으로 인해 뒤처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차이는 미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런 차이로 인해 개개인에 대한 보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차별화가 없다면 어느 누가 구태여 열심히 노력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평등’이라는 말이 거의 절대적 위력을 가진다. 교육·의료는 물론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정도 차이는 있으나 평등이 활개치고 있다. 이중에서도 교육의 평준화는 가히 압권이다. 학생들은 자질이나 학업성취도에 관계없이 어떤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학교에 배정된다. 전혀 이질적인 아이들이 같은 반 같은 시간에 똑같은 수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소위 교실붕괴가 일어나고 돈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낸다. 그만큼 돈이 없는 부모는 사설학원이 밀집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가야 하고 그보다 형편이 더 나쁜 부모는 가슴만 두드려야 한다.
이 같은 교육평준화를 절대진리인 양 믿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창호가 단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아이와 바둑강의도 듣고 연습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또 박세리에게 골프 배운 지 한 달 된 아이와 골프연습을 하라고 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공부도 이와 똑같다.
이미 오래 전 영국의 경제학자 로이(Roy)는 간단한 수학적 모형을 이용해 임의로 직장을 배정하는 것이 개개인 스스로 직장을 선택하게 하는 것에 비해 소득수준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 불평등성을 더욱 심화시킴을 증명했다. 임의배정이 평등이라 생각하면 평등의 끝은 더 큰 불평등이라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결과 뒤에 숨은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자신의 적성과 자질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게 되면 더욱 노력하게 돼 평균적으로 모두의 소득이 올라가고 그 결과 소득격차도 줄기 때문이다.
교육평준화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자질이나 학업성취도를 무시한 임의배정은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오히려 교육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돈 많은 부모의 자녀와 돈 없는 부모의 자녀 간의 교육불평등이 교육평준화로 인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사랑이 유별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급속한 변화를 거듭해 온 우리 현대사를 생각할 때 교육이 가장 현명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즉 교육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가장 안정적일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리 평준화를 강요해도 교육열이 식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기유학열과 대치동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살고 있는 동네에 따른 무차별적 학교배정이라는 공권력의 횡포가 지속되는 한 결국 시장이 공교육을 대체할 것은 자명하다. 교실이 무너져 사설학원은 날로 번성하고 심지어 외국학교가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와중에 무너진 교실에 남게 될 아이와 교실을 떠날 수 있는 아이간의 교육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됨도 물론이다.
이제 제발 공부 잘하는 아이는 공부 잘하는 학교에, 노래 잘하는 아이는 노래 잘하는 학교에 갈 수 있게 하자.
오성환 / 서울대 교수·경제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4. 1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