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위협

'부정부패가 도를 넘어'로 시작되는 한 '법관개혁모임'의 발족 취지문처럼(10월 15일) 이 정권 들어 비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있다.

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우리 부패의 심각성을 아프리카의 전근대국가 짐바브웨와 같은 수준에 놓았다는 것만도 국제적으로 우리 부패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부정 비리들을 폭로하는 언론들을 정부가 옥죈다 해서 국제언론인협회(IPI)는 우리를 '언론자유탄압 감시대상국'명단에 올려놓고 있고, 국회가 부정 비리들을 의사당 안에서 마구 폭로한다 해서 검찰총수가 의원들의 면책특권 제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대의정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의원 면책특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공격되고 그렇게 쉽게 의미가 추락될 수 있는지, 우리 정치사가 아무리 파란만장하기로서니 그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런 전례를 어떻게 남길 궁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 비리 폭로하는 언론 · 야당

가장 엄정해야 할 검찰이 권력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는 소리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듣는 소리고, 힘쓰는 여타 공기관의 위상과 신망 또한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소리도 어제 오늘 듣는 소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권위도, 정부의 권력도, 여당의 권세도 권도를 잃고 신뢰를 잃고 체면을 잃기는 마찬가지다.가장 민주적이라고 자처하고 나선 이 정부가 해를 거듭할수록 어째서 셀 수 없이 비리를 쏟아내는 정부가 됐을까.

모든 정부의 기본임무인 국가관리 능력과는 어째서 그토록 담을 쌓은 정부가 됐는가. 심지어 그보다 더 가혹한 평마저 듣고 있지 않은가. 가장 비민주적인 정부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가장 권위주의적인 권력보다 더 권위주의적이며, 가장 독재적인 집권자보다 더 독재적이라는 혹평.

이 모든 혹평을 총합하는 '제왕적 통치'라는 말은 일반 국민에 앞서 정권실세 내에서 먼저 뱉어져 나온 말이 아닌가.

그런 말이 나오도록 어째서 그토록 공식규범 공식기구의 법치(法治)가 무너지고 비공식라인의 끼리주의 인치(人治)가 판을 치게 됐는가. 무엇이 문제가 되어 실타래처럼 얽힌 오늘의 난맥상이 됐는가. 그 책임의 일체는 어떻게 강변(强辯)해도 정부 권력을 장악한 '민주화투쟁세력'에 있다.

그들 스스로 '도덕성'으로 무장되지 않은 채 투쟁을 벌인 바로 그곳에 원죄가 있고,스스로 도덕성으로 체화(體化)되지 못한 채 너무 크고 너무 감당이 어려운 권력을 잡은 데 지금의 결과가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그들 집단 내부에 형성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개인 의식에 각인되기도 전에 정권이 너무 훈련 없이 너무 준비 없이, 그리고 너무 지식 없이 쥐어진 데 있다.

그들 이전의 '산업화세력', 그들 피나는 투쟁의 가장 격렬한 대상이었던 그 산업화세력은 가장 이른 시일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산업화를 이룩하는 공(功)이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는 전혀 없는 비리가 산적하고, 인권을 유린한 비민주적 세력이었지만 그들 모든 과오를 넘어서는 업적과 현실적 역량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 업적 그 역량이 아직도 그들 세력에 대한 국민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권력을 전리품으로 착각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없고 업적을 낼 만한 현실적 역량도 없는 정치세력이라면 그 세력의 정치행태는 어떻게 되는가.

더 논할 여지 없이 그 세력은 과거 힘들게 싸웠던 것만큼 대가를 요구하고, 고통받고 고문당했던 것만큼 보상을 요구하는 복고조의 퇴영적 정치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집단에 그 대가, 그 보상으로 권력이 주어졌을 때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착각되고, 그 착각으로 행해지는 것만큼 비리가 쌓인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것은 개혁이다.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함에도 그 책임은 언론과 야당에 전가되고, 있지도 않는 기득권세력에 구실을 달고, 수구세력이니 반통일세력이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허상을 만들어 죄를 씌운다.

논어에 그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진다(其身正 不令而行)는 말이 있다. 도덕성이 내재화되지 않는 정치집단의 권력만큼 시행되지 않는 권력은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없는 정치집단만큼 민주주의의 큰 위험이며 위협이 없다.

송복 (연세대.정치사회학 교수)

출처 - 중앙일보 송복교수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2001. 10. 28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