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통령 뽑아야 하나 | |
2002-10-22 | |
어떤 대통령 뽑아야 하나 갖가지 정치적 부정과 비리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 ‘권력 이동’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주 이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권력이 독점되지 않는 것은 정치인들의 복지를 위해서도 좋고, 국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권력 이동이 너무 잦으면 권력이 약화되고 국민의 자유는 확장되기 때문이다. 어느덧 5년이 지나 이런 기회를 다시 한번 갖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자신의 의무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타락한 정치인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갇혀서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헤아릴 능력을 갖지 못했다. 만사를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 국가가 망할 것처럼 말하곤 했다. 자신의 행복과 국민의 행복을 동일시하여, 국가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정치인들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불행하게 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크게 발전했다. 이룩한 것에 대한 성취감보다 이룩하여야 할 것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동안 이룩한 것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역사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천년 왕국이 도래하듯 전체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성이다. 우리는 분명히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간단하다. 4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대통령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20대에 접어든 딸은 5번째의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대단한 역사적 성과이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다수결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에 있으며, 정치 발전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치 지도자가 교체될 때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는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럽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었을 때도 하나의 신문이 아니라 여러 일간지가 발간되었다. 그 때에도 우리는 하나의 신문만을 구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신문을 구독하였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의 일간지면 족하지 여러 일간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사실은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러 개가 다 똑같은 신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일간지들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존재하였고, 우리는 좀더 좋은 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을 구별할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좋은 후보와 덜 좋은 후보, 덜 나쁜 후보와 더 나쁜 후보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자신이 할 일을 많이 열거하는 후보보다는 그렇지 않은 후보가 덜 나쁜 후보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치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을 해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가 물러서고 민간이 그 일을 대신하여야 한다. 국가가 일하고 국가가 책임지는 부분을 줄이고 민간이 일하고 민간이 책임지는 영역을 확장하여야 한다. 국가가 일을 줄이면 줄일수록 개인의 자유, 선택과 책임은 그만큼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 비난보다 자신이 할 일만을 말하는 후보가 덜 나쁜 후보이다. 정치 지도자의 자질은 상대방의 약점을 얼마나 잘 발견하여 폭로하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현재화하여 국민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정당의 이름으로 정책을 이야기하는 후보가 덜 나쁜 후보이다. 한 정치인의 수명보다는 한 정당의 수명이 길어야 하며, 우리는 한 정치인보다는 한 정당을 더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섭 (강원대 사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2. 10. 22 포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