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곳 과감히 도려내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야말로 김대중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이다. 수많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강요한 역경을 김대중 대통령만큼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투쟁하여 승리한 정치인은 사실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고 많은 사람들이 타협할 때 정치인 김대중만큼은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한 가시밭길을 선택하여 투쟁해 왔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국민의 정부’가 지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한 젊은 벤처 사업가가 뿌린 돈의 행방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검찰의 본격적인 재수사가 시작되면서 정치권은 바짝 긴장하고 있고, 언론은 연일 특종을 노리며 ‘진승현 게이트’에 관한 보도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정부 여당의 최고위 실세들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이들을 둘러 싼 의혹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국민들은 부패의 악취에 혀를 내두르는 실정이다. 그토록 개혁을 주장해 온 정권의 실체에 국민들은 허탈할 뿐이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 온 개혁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우선 벤처라는 새로운 경제영역이 부패의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97년의 경제위기 이후 과거 성장의 주역이었던 산업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대신 국민의 정부는 벤처라는 젊고 새로운 산업분야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자원을 쏟아 부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정부가 직·간접으로 벤처를 지원한 자금의 합계는 아마도 최근 문제가 된 회수불능의 공적자금 규모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진승현 게이트’와 같은 ‘검은 연결망’의 확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 재벌과 권력의 유착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벤처와 권력의 유착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은 개혁을 이끌어가는 주체세력의 도덕성과 관리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공조직에 제대로 속한 인물도 아닌 사람이 특수층의 지위를 도용해가며 검찰이나 국정원과 같은 권력기관을 종횡으로 요리했다는 사실은 국가의 기강이 그만큼 엉망이었다는 방증이다. 더구나 이를 감시해야 할 청와대의 민정수석마저 이 사건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정말이지 치명적이다. 법과 제도를 국민들이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야 하는 기관에 의해 법과 제도가 유린되고 있는데 어느 국민이 개혁에 동참하겠는가.

또한 이 사건은 스스로의 보신을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국민들을 얼마든지 배신하고 나아가서 협박까지도 할 수 있다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드러난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리스트’가 아니고, 더 이상의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내가 당하면 너도 당하게 만들겠다”는 협박용 리스트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권력기관에서 보신용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고통을 동반하는 개혁이 추진될 수 있는가.

개혁의 지속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썩은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고통의 분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현실을 고쳐나가는 일이 개혁이라고 한다면 이번 사건은 오히려 개혁을 보다 확실히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스스로의 고통을 감수하며 개혁하는 모습을 국민들이 확인할 수 있을 때 개혁은 설득력을 얻는다. 솔선하지 않고 수범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따라 오지 않는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 본다.

유석춘 (연세대교수·사회학)

출처 - 조선일보 시론 2001.12.16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