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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말 ‘財界 길들이기’
2002-08-12
임기말 ‘財界 길들이기’ 월드컵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던 지난 6월 19일 김대중 대통령은 주요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가진 일이 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월드컵 성공의 과실을) 경제분야에서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경제계 지도자 여러분들의 공헌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포스트 월드컵 대책에 재계가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 다음날 전윤철 부총리는 ‘한국 CEO포럼’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통해 “CEO가 그룹총수에 종속돼 있는 낙후된 지배구조가 외환위기의 주요한 원인이었음에도 여전히 그런 경향이 남아있다”며 ‘주주의 이익을 지켜내는 뚝심’을 요구했다. 그룹총수들과 덕담을 나눈 지 하루 만이라는 점에서 이율배반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두드러진 재계와 정부 사이의 갈등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재벌에 대한 정부의 사시(斜視)와 습관적인 ‘뒤통수 때리기’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기업들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면서 스스로는 ‘한국적 풍토’를 이유로 낡은 규제의 틀을 고집하고 있는 정부의 이중잣대가 재계를 더 자극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4대 그룹 부당내부거래 조사문제만 해도 그렇다.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뚜렷한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투망식 조사’를 통해 ‘한 건’ 올리겠다는 구태(舊態)는 충분한 시빗거리가 될 수 있다. 정부는 1999년에 100억원 이상의 내부거래는 반드시 이사회 의결을 거쳐 공시하도록 했다. 미심쩍은 거래에 대해 언제라도 조사에 착수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공정위가 느닷없이 지난 2년간의 내부거래 내역을 모두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은 관권(官權)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계열사 간 거래에 대해 정부가 굳이 ‘부당(不當)’이라는 딱지를 붙여 문제삼는 것 자체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먼 한국적 발상이다. 공정위가 매년 ‘출자총액제한 기업집단 주식소유현황’을 발표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특히 공정위는 최근 발표한 자료에서 지난해 여·야·정 합의로 출자총액 규제를 완화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내부지분율이 줄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기도 했다. 규제를 완화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르쇠’로 시비를 거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출자총액규제는 정부 스스로도 장기적으로 폐지해야 할 제도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글로벌 경제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舊)시대 유물이다. 또 정부가 민간기업의 내부지분율을 시시콜콜 따지면서 타박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고 무조건 재벌을 편들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반(反)재벌 정서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상당부분 재벌에 그 책임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개혁 과정에서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기업 지배구조와 경영의 투명성 측면에서 한국 기업들은 갈 길이 멀다. ‘황제식 경영’의 폐해가 완전히 근절됐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정부의 규제강화가 그 해결책일 수는 없다. 정부는 ‘시장의 규율이 확립될 때까지는…’이라며 ‘한국적 규제’의 필요성을 강변하지만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지난 6월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인 현대모비스가 오너의 장남이 대주주로 있는 본텍과의 합병계획을 포기한 일이 있다. 그에 앞서 지난 4월에는 제일제당의 이재현 회장이 1000억원대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폐기처분했다.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라는 시장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의 힘이 급성장하면서 그룹 총수들의 자세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이제는 ‘시장의 규율’을 대신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재벌문제도 구태의연한 재벌정책이 아닌 경쟁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업 경영의 고유영역까지 직접 규제하겠다는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재계 길들이기’라는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 金基天 (논설위원 ) 출처 - 조선일보 2002. 8. 12 경제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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