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장이 열리고 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에 최근 들어 일련의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해외 어학연수에 이어 외국대학에서 전공과목을 수강하는 사례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방학을 이용해 단기간 해외 연수를 하던 것이 이제는 아예 한 두 학기를 할애하여 외국어나 전공 과목을 수강하고 돌아오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학생들이 대학을 학부 기준 수학 연한인 4년을 넘겨 졸업하는 것이 보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여 다양한 제도의 보완을 시도하고 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출 경우 외국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을 인정하는 제도를 열어 놓고, 외국 대학과 공동 학사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공동학위를 수여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여름 졸업자가 늘어나는 데 따라 대학원에 후기 입학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와 연관되어 있다.

서울대를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나라 전체를 살펴보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외국 대학에 유학하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나 그 양태가 다양해지고 폭이 넓어졌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초·중등과정에서 이미 유학을 떠나는 학생의 수까지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중산층 이상에 속하는 집안의 자녀들이다. 공부를 못해서 떠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우수한 학생들이다. 언젠가 유학을 가야한다면 입시지옥과 허술한 국내대학의 교육을 받을 것 없이 일찌감치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밑져도 영어 하나는 잘하게 될 것이니, 요즘 세상에 그게 어디냐는 것이다. 아이만 내보내기가 불안하니 아예 애 엄마까지 딸려서 내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다. 처자식을 내보낸 후 돈벌어서 송금하는 일을 낙으로 삼아 혼자 '조국'을 지키고 있는 '이산가족 가장'의 얘기는 이제 시정의 화제 거리도 아니다.

다시 서울대로 눈을 돌려 다른 면을 살펴보자. 학부생은 그렇다 치고, 본교 출신 중 대학원을 지원하는 학생 수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유학을 떠나는 수가 늘어나는 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면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학생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또 한번 유학의 망이 걸러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어떻게 되나? 대학과 연구소에서 외국 대학의 박사학위를 서울대를 포함한 국내대학의 박사보다 '선호하는' 차별 때문에 많지도 않은 취업 기회를 향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이 현실이다. 궁여지책이랄까? 결국 '박사 후 연수' 또는 '연구원'으로 외국의 명문대학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는 이가 또한 늘어나고 있다. 이쯤서 더 아픈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기로 확정된 후에 귀국을 포기하고 외국 대학에 남겠다고 통보해 오는 이들이 열 손가락을 다 써야 할 만큼 늘어났다. 전에 없던 일로 돈과 함께 사람까지 잃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교육의 세계시장이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육이라는 서비스 상품의 열렬한 소비자인 우리 국민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외국의 명문대학들로 달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고급인력들이 애국심만으로 귀국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더 나은 보수, 더 좋은 연구여건, 거기다 자녀교육 여건을 포함한 더 나은 생활의 기회를 버리고 귀국 짐을 꾸리는 일은 열린 시장에서의 합리적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이들을 위해 서울대의 국제 경쟁력을 일별 해 보자. 예산 규모로 보면 서울대의 예산 규모는 외국 명문대학의 10분의 1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서울대의 연간 총예산이 2,400억 원 내외인데 비해, 예컨대 시애틀의 워싱턴대학의 예산은 3조 2000억 원에 이른다. 교수의 처우나 교육·연구시설의 수준도 대체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건 하에서 서울대의 작년 SCI 논문 편수가 전 세계 대학들 중 55위(국가별로는 공동 6위)에 랭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더 상위로 올라가기를 바란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국내에서는 낫다는 서울대학의 형편이 이러할진대 다른 대학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방대, 사립대에서 서울대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나라의 명운을 걸고 고급인력 양성에서 저들과 맞서 경쟁해야 하는 서울대가 처해 있는 현실 또한 처절한 것이 사실이다.

공산품 시장, 농산물 시장, 금융시장이 열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걱정하였고, 그에 대비하여 국내 산업과 시장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였던가?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또 얼마나 많은 공적 자금을 지금도 투입하고 있는가? 국제교육시장이 열렸는데 우리 교육, 특히 대학이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농업이나 기업의 경쟁력이 뒤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는 후자의 경쟁력은 물론 전반적 사회발전을 주도할 고급인력과 그 잠재력까지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봇물 터지듯 교육시장이 열리고 있는 현실과 그것이 가져오는 지식경쟁에서의 낙후를 우리 정책 당국은 얼마나 절실하게 염려하며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미국 국가 경쟁력의 가장 큰 원천이 전 세계로부터 몰려든 고급 두뇌에 있다면,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로 그 고급두뇌의 양성기반이 취약하다는 것과 그 유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데 있다. 정보사회란 무엇인가? 지식산업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뇌 유출에 따른 지식의 격차가 국력의 격차를 가속적으로 넓힐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리하여 국가 간에 지식의 종속관계가 구조화된 후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의사결정의 실질적 권한과 그 결실은 두뇌가 모인 쪽으로 흘러가고 만다.

농경시대에는 일 잘하는 이가 몇 명만 있으면 한 집안, 한 마을이 잘 살게 된다. 산업시대에 뛰어난 제조업 기술자 몇이 있으면 한 지방이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지식정보시대에는 탁월한 전문가 몇이 있으면 온 나라가 잘 살 수 있다. 그 차이는 축력과 기계, 그리고 컴퓨터간 기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고급인력 양성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는 주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 하에서도 한가하게 국내 대학들의 평준화에 안주하고 획일적 규제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거국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루가 급한 일이다. 대학 스스로 해야할 일이 많음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입학, 학제, 재정, 인사의 여러 부문에서 지금처럼 이리저리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는 열린 국제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 더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정책 당국의 숙고와 용단을 기대한다.

유우익(비전@한국 공동대표, 서울대 교무처장)

출처 - 비전@한국홈페이지 회원칼럼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