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시녀가 된 음반업계 | |
2002-07-18 | |
방송사 시녀가 된 음반업계 잊을 만하면 터지는 방송사 PD 뇌물수수 파동은 거의 언제나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격으로 유야무야됐었지만, 이번엔 검찰의 의지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확고해 보인다. 사실 가요계의 ‘PR비(음반홍보비)’ 로비는 실재한다고 믿어지면서도 유령처럼 은밀히 ‘소문의 벽’만 쌓아 왔다. 검찰의 주장처럼 음반회사와 방송 및 언론사들이 어두운 거래를 통해 추악한 스타덤을 만들어 내고 그 오염된 메커니즘이 한국 음반산업의 미래를 더럽히고 있다면 엄중하게 단죄돼야 한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자들의 검찰 소환과 구속 사태 와중에 냉정하게 짚어봐야 할 것은 뇌물을 제공한 사람과 받은 사람을 처벌한다고 구조적인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TV 수상기 보급이 비약적으로 이뤄지고 TV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3공화국 시대부터 PD 파동은 지속적으로 있었고 많은 PD가 옷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가 반복되는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순과 비리를 극복할 근원적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떤 분야건 뇌물에 의한 로비의 본질은 대단히 단순하다. 수많은 이윤 창출 노력 중 비용 대 산출 효과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 혹은 가까운 일본과 달리 중앙집권적이고 독과점적인 공중파TV 방송의 구조상 어떤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브라운관의 영토’에 진입해야만 전국적인 스타 마케팅이 이루어지는 탓이다. 게다가 대중음악산업의 주류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문화로 바뀐 마당에 어떤 수용자가 ‘보지 않고도 믿는 진복자’의 선택을 하겠는가? 미국이나 일본의 대형 음반회사나 가수들도 우리와 똑같이 치열하게 (혹은 불법적으로) 방송사들을 향해 로비를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가 전면화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음악문화가 공존하고 또 장기적이고 다양한 마케팅 통로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 경우는 다르다. 한국 음반산업은 ‘방송사의 시녀 문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벼랑 끝에 선 존재이다. 허약한 공연 인프라, 유명무실해진 FM 라디오, 뮤직비디오 홍보 매체로 전락한 케이블TV, 역시 홍보 지면으로 둔갑한 신문의 매체 비평,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는 저작권. 거개의 제작자들은 이처럼 황폐한 절해고도에서 ‘살아 남기 위해’ 브라운관 앞에 목을 들이민다. 이와 같은 TV 방송사들의 독과점이 근원적으로 제거되기 전까지 자의적인 기준으로 좌우되는 이른바 가요순위 프로그램과 시청률이라는 앙상한 논리로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본질을 호도하는 비음악적 오락 프로그램들을 공중파 방송에서 먼저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영국 BBC처럼 예능제작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교양제작적 관점에서의 음악 프로그램 모델을 용기있게 제시하여야 한다. 음악 본연의 방송인 FM라디오의 재정립도 중요하다. 연예인의 신변잡담 방송에서 벗어나 전문 진행자에 의한 ‘FM 제국’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음반제작자와 가수 같은 ‘음악 생산자’들의 인식도 이와 발맞춰 제고돼야 한다. 미국의 3대 공중파TV에 우리처럼 유명 가수들이 낯뜨겁게 법석을 떠는 오락 프로그램이 없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 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런 프로그램에 나가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기를 거부하는 스타들의 철학 때문이다. 음반사와 방송사의 노예가 아닌 창조적 예술가라고 당당히 주장하려면 음악과 음악인을 모욕하는 TV 프로그램에 대해 결연하게 “No!”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며칠 전까지도 ‘한류(韓流)의 주역’이란 갈채를 받던 한국의 음악 관계자들이 검찰 수사를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풍경 대신 이런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조선일보 2002. 7. 18 시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