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곱씹어 보기 | |
2002-07-11 | |
한국경제 곱씹어 보기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 환란위기를 맞은 시기는 1997년 11월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 아시아 금융위기가 시작된 시기는 지금부터 만 5년 전인 97년 7월이었다. 97년 이전 10여년 전부터 계속 불어난 무역수지 적자 때문에 극도로 취약해진 태국 바트화는 97년 봄부터 외환시장의 집중공격을 받아 외환보유액을 거의 다 쓰면서까지 노력한 중앙은행의 혼신적 방어에도 실효를 못보고 쓰러졌다. 결국 7월 초에 과거 17년 동안 유지됐던 달러당 25대 1의 바트화 고정환율제도는 허물어졌고, 마침내는 50대 1까지 추락했으며, 오랫동안의 고정환율을 믿고 외화를 대량으로 빌려쓴 태국의 금융기관과 회사들이 파산에 직면하자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그 여파는 주변국가인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휘몰아 쳤고, 마침내 10월 하순에는 홍콩 주식시장을 강타하며 북상하다가 11월에는 한국도 IMF에 긴급구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아시아의 금융위기 5주년이 된 지금 우리나라 경제도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볼 수 있다. 금융권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외에도 무역수지의 적자에서 흑자로의 전환과 과감한 해외 직접투자 유치 등은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97년 말 거의 바닥났던 외환보유액은 이제 1천억달러를 훨씬 넘어서 세계 5위를 차지하게 됐으나, IMF 환란의 암울한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95년에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었다고 샴페인을 터뜨렸는데 IMF 환란 이후 왜소해진 원화가치 때문에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8천9백달러로 7년 전인 94년의 9천달러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81년에 달성한 일본은 5년 후인 86년에 2만달러로, 10년 후인 91년에는 3만달러로 성장했으며, 우리나라보다 6년 먼저 89년에 1만달러를 달성했던 싱가포르도 일본처럼 5년 만에 2만달러에 도달했다. 올해 초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예측에 따르면 2011년에 가서야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천달러에 이를 것이라니, 이미 11년 전에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한 일본을 우리나라 일부 식자계층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미 노쇠국(老衰國)이라고 비웃을 수만은 없겠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3만달러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이번 월드컵 4강진출에서 보듯이 우리 국민의 잠재능력은 어느 선진국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지만 그 능력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데는 우선 당장의 이해관계와 소국민적인 집단이기주의에 눌려 성공하지 못했다. 전세계에 1백40여개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거미줄처럼 널려 있는데도 세계 총교역규모 12위인 우리나라는 단 하나의 FTA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우리 정부가 남미의 칠레와 FTA 협상을 꾸준히 추진해왔으나 사과와 포도를 재배하는 극소수 농민의 집단이기주의와 이에 동조하는 속좁은 일부 언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4천8백만 전체 국민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한.미간 투자협정(BIT)도 국내 영화제작 업계의 끈질긴 반발에 부닥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강성노조는 세계적으로 그 악명이 높아 해외 투자업체들을 포함한 여러 사업장에서 불법 파업을 공공연히 저질러왔다. 걸핏하면 삭발하고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서울 네거리로 뛰쳐나와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우리나라 노조원들은, 회사경영진의 사기행위로 39억달러의 분식회계 결과 회사가 망하게 돼 8만명 고용원 중 1만7천명을 감원한다고 최근 발표한 미국 제2위의 장거리 전화회사인 월드컴의 결정에 조용하게 따르는 미국 노동자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할 것인가. 우리나라 물류비용이 아직도 일본의 두배를 넘고, 한국의 기업환경이 경쟁상대인 홍콩.싱가포르.도쿄.상하이 보다 월등히 낮다는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의 보고서는 아시아 금융위기 5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경제 선진화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해준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 8천9백달러는 98년 아르헨티나의 8천5백달러와 비슷하다. 또 우리가 지금 국제금융기구들과 일부 서방언론으로부터 금융위기를 제일 잘 극복했다고 칭찬받고 있는 현상도, 90년대 중반까지 아르헨티나도 그 이상으로 국제금융계의 칭찬을 받았음을 상기하며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는 더욱 겸손한 태도로 경제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 출처 - 중앙일보 2002. 7. 11 시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