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그들'을 느껴라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모든 나라를 다 자신의 조국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강한 어른과도 같다. 그러나 세상 전체가 다 외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聖) 빅터의 유고(Hugo of St. Victor)가 남긴 말이다. 즉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만을 최고로 알고 자신의 문화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타민족과 타문화를 받아 들이고 포용하는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라는 것이다. 유고에 의하면, 문화제국주의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바로 문화국수주의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조국과 고향에 강렬한 집착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부단히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 나갔던 미국인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집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살이의 설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움과 이별과 향수가 끊임없이 우리 가요의 대표적 주제가 돼온 이유도, 또 타국의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채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오는 역(逆)이민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도, 그리고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면 우선 고향부터 묻고 동향끼리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지연과 혈연을 중시하게 됐고 타지역과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게 됐다. 학연이라는 것도 사실은 강렬한 모교(母校)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신학교를 곧 자신을 길러준 고향과 어머니로 생각하는 한, 동창(형제자매)끼리의 긴밀한 유대와 다른 학교 출신에 대한 배타적 감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뿌리깊은 연고주의와 파벌 형성, 그리고 그것의 필연적 결과인 청탁과 특정그룹의 독점과 폐쇄성은 그렇게 해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한국 특유의 그러한 혈연·지연주의는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교포들까지도 모두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이민간 나라의 사람들이지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닌 데도 우리는 그들을 여전히 우리 동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뉴욕주립대를 방문했을 때, 그곳 영문학과에 재미교포 작가가 교수로 오게 됐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곳 영문학과에도 드디어 한국인 교수가 오게 돼 기쁘다”고 했더니, 그곳 미국인 교수가 대뜸 정색을 하며 “한국인 교수가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교수”라고 내 표현(사실은 내 사고방식)을 정정해 주는 것이었다.

며칠 전, 서울대 문화관 광장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마련한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 유학생들이 아름다운 자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벌이는 문화축제와 현장에서 조리한 각 나라의 고유음식은 행사에 동참한 서울대 학생들로 하여금 세계로 향한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세상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른 나라의 문화도 우리 문화만큼이나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울리며 공존하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라는 것을 그 행사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부총장과 본부 간부들은 한결같이 “대학문화라는 것이 사실은 이런 것인데, 우리 학생들은 왜 캠퍼스에서 늘 시위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다.

문화비평가들은 지금 우리가 문화상품 시대, 또는 문화 전쟁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화는 본질적으로 전쟁도 상품도 아니다. 문화는 다만 서로 교류하고 뒤섞이며 공존하는 각 나라의 값진 정신적 유산일 뿐이다. 그런데 자꾸만 자신의 고향과 조국으로만 회귀하는 사회에서는 타문화와의 진정한 교류와 혼합과 공존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에서 벗어나 ‘그들’에게로 눈을 돌려 타자와 타문화를 포용하고 우리가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해야만 한다. 외부와 교류하는 성숙한 어른이 돼야지, 언제까지나 자기 것만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金聖坤 / 서울대 교수·영문학 )
출처 - 조선일보 2002.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