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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칼럼] 남쪽에서도 소외당하는 탈북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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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8 |
게오르규의 ‘25시’는 2차 대전 당시의 루마니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치스에 학대받고, 그런데도 얼굴이 순종 게르만족처럼 생겼다 해서 엉뚱한 ‘꼭두각시 영웅’ 대접을 받고, 그리고 그 ‘전과(前科)’ 때문에 전쟁 후에는 또 연합군의 포로로 계속 이단자 취급을 받고…. 이 오갈 데 없는 ‘중음신(中陰身)’ 신세는 오늘의 한국 하늘 아래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바로 탈북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반동이라’ ‘김부자(金父子) 초상화를 잘못 다뤄서’ 졸지에 북한 요덕 수용소 정치범이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25시’의 무(無)존재로 증발했다. 모진 고생 끝에 그들은 남쪽으로 탈출해 ‘24시’의 인생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망은 남쪽에서도 산산조각이 났다. 한국의 이른바 ‘북한 전문가’라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은 “우리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액면대로 믿지 않는다”라는 냉대를 받았고, 김정일 추종자들로부터는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했다. 언필칭 반독재 인권운동을 하였네 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남북 간의 평화’와 ‘북한인권 운동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탈북자들은 빠져달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결국 남쪽에서도 오갈 데 없는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가 되라는 ‘확정판결’이나 다름없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중단 없는 전진’을 위해 “자유니 민주니 인권이니 떠드는 자들은 입 닥치고 ‘뼁끼(변기)통’ 옆에 콱 찌그러져 있어라”며 윽박질렀다. 그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 김일성 이 쳐내려 온다는 궤변을 끌어댔다. 그런데 그 콱 찌그러져 있던 민주와 인권의 ‘피해자’들이 이제는 그와 똑같은 궤변을 오늘의 탈북자들을 향해 퍼붓고 있다. 탈북자들이 앞장서서 북한인권을 시비하지만 않으면 ‘한반도 평화’ 추구가 순순히 풀리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김정일이 남북대화에 응해 주는 것을 무슨 큰 시혜나 베푸는 것처럼 뻐기면서 걸핏하면 ‘대화중단’ ‘서울 불바다’ 공갈을 쳐대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일방적 비위 맞추기와 퍼주기가 길들여 준 행패이지, 탈북자들의 인권운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김정일의 그런 고자세를 잔뜩 버릇 들여 놓고 이제 와서 누구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건가? 탈북자들이 앞장서면 북한인권 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소리 역시 고약하기 짝이 없는 폭언이다. 탈북자 정성산 감독이 ‘요덕 스토리’를 무대에 올리면 한국 사람들이 북한인권 운동에 참여하려다가도 “어이구, 탈북자가 김정일을 저렇게 흔들다가 전쟁 나면 어쩌나…” 하고 뒷걸음질을 칠 것이란 소리인가? 정히 그렇게 주장할 양이면 교육문화회관 공연현장에 나가 관객들에게 어디 한번 물어보라. “탈북자가 앞장서서 만든 저 뮤지컬을 보고 나니 북한인권에 대해 떠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는가?”, “김정일 폭정에 새로이 눈을 떴는가, 안 떴는가?”라고. 인권운동은 학살 체험자들의 “악!” 하는 비명에서 출발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인권이라기보다 생존권이다. ‘요덕 스토리’도 “거기 누구 있으면, 이 비명 들리는지…”라고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을 학대한 형리(刑吏)를 곤란하게 만들어선 일이 안 되니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하거나 “비명을 질러도 뒤에서 하라”고 한다면, 이게 도대체 말이 되겠는가? 이것이 저 ‘시민운동가’들의 소위 ‘평화’요 ‘대중성’이란 말인가? 그것은 ‘평화’도 ‘대중성’도 아닌 ‘피해자 나무라기’의 오류일 뿐이다. 이런 소리에 주눅들지 말고 탈북자들은 더 앞장서서, 더 처절하게 그들의 피맺힌 통증을 토해내야 한다. 마침내 저 마(魔)의 ‘요덕’이 해체될 때까지…. 그리고, ‘25시’의 인생을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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