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 of production는 근본적으로 계급 관계class relation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구분이 있을 뿐 가격과 품질 앞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평등하다. 시장의 이런 본질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바뀐 것이 없다. 시장은 自生的인 交換이며 적어도 이 교환 행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개인'들이다.
변한 것은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 상품적인 성격이 '별도로' 추가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은 자본과 상품에 대한 物神信仰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는가. 인간은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다. 노동에 非상품성 특성 외에 상품성이 가외로 추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추가로 인해서 오히려 인간은 더 자유롭고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획득하였다. 평등은 계급 혁명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성장을 통해서 달성되고 있다. 自給自足이 유일한 경제 방식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농토와 가축에 매달려 살아야 하고 자신과 가족의 노예 신세를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농토와 가축 마저 없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노예 노동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과 상품 노동을 팔면서 자유로운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이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을까.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상품 노동을 함으로써 오히려 생존 노동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시장에서는 파는 사람과 사람의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 골동품, 예술품, 희귀품을 제외하면 파는 사람은 드러나 있고 사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게를 차려 놓고 있는 사람은 거의 파는 사람들이다. 파는 사람은 사는 사람에게 손님은 왕이다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굽신거리지 않을 수 없다. 길게 보면 경제의 역사는 점점 더 파는 사람이 굽신거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화폐 경제의 발달은 시장과 분업의 발달과 함께 파는 사람의 지위를 사는 사람에게 간청하는 쪽으로 격하하는 것을 加速하는 힘이었다. 시장은 장기적으로 항상 공급 능력이 수요 능력을 초과하도록 유인하는 重力의 역할을 해 왔다. 공급자들은 수요자들의 환심을 사서 자기 물건을 팔아 내려고 애 쓴다.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올린다. 이것이 공급자끼리의 '경쟁'이다.
시장은 공급자를 고단하게 만든다. 끊임 없는 경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을 독점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피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규모의 이익'과 규격 제품의 量産이 정당화되는 산업 부문이 이 시기 독점의 지위를 享有했다. 發電, 통신, 금융,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제품 등이 대체로 1970년대까지 이런 산업에 속했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거대기업과 노동조합이 密月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평생 고용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예사로웠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노동 시장의 경직성이 용납될 수 있었던 근거에는 독점적 대기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기업은 시장과는 달리 位階的이고 비만한 조직이다. 노동조합은 대기업의 이런 위계성과 비만성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적어도 국제 교역이 활발한 상품을 생산에서는 대기업의 독점은 전 세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기업은 다른 기업들처럼 시장의 요구에 의하여 수평적이고 날씬한 조직이 되어 가고 있다. 일부에서는 시장만 남고 기업 조직은 사라질 것이라는 극단적 예언이 힘을 얻고 있다. 시장과 기업을 대조시키는 경제학은 영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가 그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다.
코즈에 의하면 시장의 거래 비용이 충분히 싸지면 기업은 사라지고 개인이 기업을 대신하여 모든 생산 배급 활동을 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시장에 거래 비용이 있기 때문이며 거래 비용이 비싸면 비쌀 수록 대기업이 유리하게 된다.
한국에서 대기업과 대기업 집단들이 왕성한 번식을 보이면서 경제 생태계의 큰 자리를 차지한 것도 대부분 코즈의 거래비용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경제 발전 초기에 시장의 高거래비용은 시장의 발달이 늦어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금융시장에서 대출을 받기 힘들었다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시장의 고비용을 장기적으로 고질화시켰던 것은 정부의 규제였다. 수입의 규제, 사업 인허가의 규제에 더하여 정치가와 관료에 의한 고율의 부패비용 부담이 差益地代와 유사한 성격을 띄고 시장의 거래 비용의 本領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예컨대 사업허가와 실수요자 수입 허가를 얻은 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출 금융도 이런 有資格 기업만 대상으로 삼았다.
정보화-글로벌화 시대가 되면서 제조업에 속하는 산업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점은 全세계적으로 막을 내렸다. 시장의 거래 비용이 대폭 싸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기업 조직은 살아 남기 위하여 수평화와 슬림화를 旗幟로 내걸었다.
관료적 위계형의 대기업 조직은 시장의 압력을 받아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 자본이 독점 산업을 지배하던 자본주의에서 케네스 갤브레이드가 말하던 관료적 경영전문가와 거대노동조합이 독재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시장이다.
이제 기업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은 자본과 그것이 동원하는 하드웨어 시설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소프트웨어인 기술과 기업 문화를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 종전에는 기술은 기계와 장치(즉 자본재) 속에 體化embody되어 있었다. 지식 경제 시대에는 기술은 사람 속에 체화된다.
기업은 두 가지 수요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업의 경쟁력, 달리 말해서 핵심역량을 대표하는 주식에 대한 수요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품에 대한 수요다. 기업은 주식과 생산품을 공급한다.
살아 남는 기업은 시장의 거래비용 보다 그 기업의 조직을 유지하고 가동하는 비용이 더 싼 그런 기업일 것이다.
시장의 거래비용이 정보화 등 때문에 싸질수록 기업을 비롯한 모든 생산조직들이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은 신뢰성이나 투명성에서는 시장 보다 훨씬 싼 거래 비용이 든다. 이 두 가지 비교우위에 더하여 기업의 내부를 시장화 또는 네트워크화 할 수 있다면 기업은 시장에서 이길 수 있다. 기업으로 하여금 내부적으로 조직과 시장을 겸하게 하자는 것이다.
시장이란 것은 자원의 가격이 수요 공급에 의하여 결정되고 자원의 배정allocation이 가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機作을 말한다. 기업의 내부를 시장화 할 때 주된 상품은 기술, 정보, 인력 등이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기업은 시장 자체처럼 조직을 점점 더 슬림化 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최고 생산품은 '신뢰'다. 신뢰는 리더십과 어느 정도의 위계성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
시장意識과 대립하는 의식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두 가지로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의식과 관료의식이다. 조직이라는 것은 모두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계급적이고 관료적이다. 기업도 이 점에서는 적어도 다소간 反시장적이다. 구조조정이란 것은 한 마디로 이러한 반시장성을 축소 내지 청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반시장적인 조직은 노동조합과 정부다.
노동조합은 통념상 사용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자신들도 그렇게 闡明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들이 대립하는 것은 시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생산조직 내부의 갈등이다. 생산조직 전체가 시장의 압력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시대 착오다. 시장에는 계급이 없고 '파는 사람' 과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노동자를 포함하는 기업은 굽신거려야 할 파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교역성이 강한 상품은 글로벌화와 정보화를 통해 시장의 압력을 매우 강하게 받고 있으나 비교적 교역성이 작은 서비스 부문은 아직도 시장의 거래비용이 높고 구조조정이 未盡한 대기업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1980년대 上昇期 이후 아직도 계급의식적 노동조합 운동이 빨리 식지 않고 있는 시기에 있다.
반항적 계급의식(노동조합)과 守護的 계급의식(관료조직)은 시장의 힘 앞에서 전략적 제휴 상황을 형성한다는 것을 우리 나라 사회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국영 서비스 대기업인 철도, 발전, 가스 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조합의 反민영화 운동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국영기업 노동자는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길래 민영화를 저렇게도 강도 높게 반대하는지 부러워하고 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정치다. 정치는 갈등을 미래 지향적으로 해소할 책무를 가진 인간 활동이다. 특히 자유주의적 경제관을 가진 것으로 자신을 내비치는 한나라당이 이들 국영대기업의 민영화 스케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들 기업의 고비용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反시장적이다.
시장이 결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다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하면서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인간 사회에서 노동이 상품화 되지 않고, 노동을 비롯한 상품의 교환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전문직이란 것은 생겨나지 못 했을 것이다.
시장의 확대가 전문적 생산방식, 또는 전문 생산품에 의한 분업을 촉진하고, 분업은 다시 시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 양자 사이에는 확대 피드백이 진행되었다. 노동시장이 없었더라면 전문적 운동선수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동은 糧食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는 운동행위를 생산하여 이 생산물을 양식과 교환한다.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스포츠의 상업화'를 스포츠의 저질화와 동의어로 쓰려는 담론이 있다. 스포츠가 상품적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띤다고 해서 스포츠 자체의 성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진주가 상품화된다고 하여 진주의 품질을 가름하는 美的 기준이 변질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업화 때문에 이미테이션 진주, 양식 진주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품위 천연 진주가 품질이 떨어지게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물건이다.
시장에서는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려 들기도 하고 싼 것을 비싼 값에 팔려는 기도도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가짜와 진짜, 싸구려와 고가품을 판별하는 기능도 시장이 가장 잘 수행한다. 관객은 더욱 스포츠 다운 스포츠를 관람하고 싶어한다. 아마도 '역사의 종언'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성장과 상품화의 진행이 끝나는 날이 아닐까 싶다.
市場과 企業, 勞組, 政府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 of production는 근본적으로 계급 관계class relation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구분이 있을 뿐 가격과 품질 앞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평등하다. 시장의 이런 본질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바뀐 것이 없다. 시장은 自生的인 交換이며 적어도 이 교환 행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개인'들이다.
변한 것은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 상품적인 성격이 '별도로' 추가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은 자본과 상품에 대한 物神信仰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는가. 인간은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다. 노동에 非상품성 특성 외에 상품성이 가외로 추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추가로 인해서 오히려 인간은 더 자유롭고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획득하였다. 평등은 계급 혁명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성장을 통해서 달성되고 있다. 自給自足이 유일한 경제 방식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농토와 가축에 매달려 살아야 하고 자신과 가족의 노예 신세를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농토와 가축 마저 없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노예 노동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과 상품 노동을 팔면서 자유로운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이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을까.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상품 노동을 함으로써 오히려 생존 노동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시장에서는 파는 사람과 사람의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 골동품, 예술품, 희귀품을 제외하면 파는 사람은 드러나 있고 사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게를 차려 놓고 있는 사람은 거의 파는 사람들이다. 파는 사람은 사는 사람에게 손님은 왕이다라는 마음으로 조금은 굽신거리지 않을 수 없다. 길게 보면 경제의 역사는 점점 더 파는 사람이 굽신거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화폐 경제의 발달은 시장과 분업의 발달과 함께 파는 사람의 지위를 사는 사람에게 간청하는 쪽으로 격하하는 것을 加速하는 힘이었다. 시장은 장기적으로 항상 공급 능력이 수요 능력을 초과하도록 유인하는 重力의 역할을 해 왔다. 공급자들은 수요자들의 환심을 사서 자기 물건을 팔아 내려고 애 쓴다.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올린다. 이것이 공급자끼리의 '경쟁'이다.
시장은 공급자를 고단하게 만든다. 끊임 없는 경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을 독점이라는 수단에 의하여 피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규모의 이익'과 규격 제품의 量産이 정당화되는 산업 부문이 이 시기 독점의 지위를 享有했다. 發電, 통신, 금융,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제품 등이 대체로 1970년대까지 이런 산업에 속했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거대기업과 노동조합이 密月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평생 고용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예사로웠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노동 시장의 경직성이 용납될 수 있었던 근거에는 독점적 대기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기업은 시장과는 달리 位階的이고 비만한 조직이다. 노동조합은 대기업의 이런 위계성과 비만성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적어도 국제 교역이 활발한 상품을 생산에서는 대기업의 독점은 전 세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기업은 다른 기업들처럼 시장의 요구에 의하여 수평적이고 날씬한 조직이 되어 가고 있다. 일부에서는 시장만 남고 기업 조직은 사라질 것이라는 극단적 예언이 힘을 얻고 있다. 시장과 기업을 대조시키는 경제학은 영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가 그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다.
코즈에 의하면 시장의 거래 비용이 충분히 싸지면 기업은 사라지고 개인이 기업을 대신하여 모든 생산 배급 활동을 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시장에 거래 비용이 있기 때문이며 거래 비용이 비싸면 비쌀 수록 대기업이 유리하게 된다.
한국에서 대기업과 대기업 집단들이 왕성한 번식을 보이면서 경제 생태계의 큰 자리를 차지한 것도 대부분 코즈의 거래비용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경제 발전 초기에 시장의 高거래비용은 시장의 발달이 늦어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금융시장에서 대출을 받기 힘들었다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시장의 고비용을 장기적으로 고질화시켰던 것은 정부의 규제였다. 수입의 규제, 사업 인허가의 규제에 더하여 정치가와 관료에 의한 고율의 부패비용 부담이 差益地代와 유사한 성격을 띄고 시장의 거래 비용의 本領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예컨대 사업허가와 실수요자 수입 허가를 얻은 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출 금융도 이런 有資格 기업만 대상으로 삼았다.
정보화-글로벌화 시대가 되면서 제조업에 속하는 산업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점은 全세계적으로 막을 내렸다. 시장의 거래 비용이 대폭 싸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기업 조직은 살아 남기 위하여 수평화와 슬림화를 旗幟로 내걸었다.
관료적 위계형의 대기업 조직은 시장의 압력을 받아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 자본이 독점 산업을 지배하던 자본주의에서 케네스 갤브레이드가 말하던 관료적 경영전문가와 거대노동조합이 독재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시장이다.
이제 기업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은 자본과 그것이 동원하는 하드웨어 시설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소프트웨어인 기술과 기업 문화를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 종전에는 기술은 기계와 장치(즉 자본재) 속에 體化embody되어 있었다. 지식 경제 시대에는 기술은 사람 속에 체화된다.
기업은 두 가지 수요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업의 경쟁력, 달리 말해서 핵심역량을 대표하는 주식에 대한 수요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품에 대한 수요다. 기업은 주식과 생산품을 공급한다.
살아 남는 기업은 시장의 거래비용 보다 그 기업의 조직을 유지하고 가동하는 비용이 더 싼 그런 기업일 것이다.
시장의 거래비용이 정보화 등 때문에 싸질수록 기업을 비롯한 모든 생산조직들이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은 신뢰성이나 투명성에서는 시장 보다 훨씬 싼 거래 비용이 든다. 이 두 가지 비교우위에 더하여 기업의 내부를 시장화 또는 네트워크화 할 수 있다면 기업은 시장에서 이길 수 있다. 기업으로 하여금 내부적으로 조직과 시장을 겸하게 하자는 것이다.
시장이란 것은 자원의 가격이 수요 공급에 의하여 결정되고 자원의 배정allocation이 가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機作을 말한다. 기업의 내부를 시장화 할 때 주된 상품은 기술, 정보, 인력 등이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기업은 시장 자체처럼 조직을 점점 더 슬림化 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최고 생산품은 '신뢰'다. 신뢰는 리더십과 어느 정도의 위계성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
시장意識과 대립하는 의식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두 가지로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의식과 관료의식이다. 조직이라는 것은 모두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계급적이고 관료적이다. 기업도 이 점에서는 적어도 다소간 反시장적이다. 구조조정이란 것은 한 마디로 이러한 반시장성을 축소 내지 청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장 반시장적인 조직은 노동조합과 정부다.
노동조합은 통념상 사용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자신들도 그렇게 闡明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들이 대립하는 것은 시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생산조직 내부의 갈등이다. 생산조직 전체가 시장의 압력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이런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시대 착오다. 시장에는 계급이 없고 '파는 사람' 과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노동자를 포함하는 기업은 굽신거려야 할 파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교역성이 강한 상품은 글로벌화와 정보화를 통해 시장의 압력을 매우 강하게 받고 있으나 비교적 교역성이 작은 서비스 부문은 아직도 시장의 거래비용이 높고 구조조정이 未盡한 대기업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1980년대 上昇期 이후 아직도 계급의식적 노동조합 운동이 빨리 식지 않고 있는 시기에 있다.
반항적 계급의식(노동조합)과 守護的 계급의식(관료조직)은 시장의 힘 앞에서 전략적 제휴 상황을 형성한다는 것을 우리 나라 사회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국영 서비스 대기업인 철도, 발전, 가스 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조합의 反민영화 운동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국영기업 노동자는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길래 민영화를 저렇게도 강도 높게 반대하는지 부러워하고 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정치다. 정치는 갈등을 미래 지향적으로 해소할 책무를 가진 인간 활동이다. 특히 자유주의적 경제관을 가진 것으로 자신을 내비치는 한나라당이 이들 국영대기업의 민영화 스케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들 기업의 고비용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反시장적이다.
시장이 결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다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하면서 이 글을 끝내고 싶다. 인간 사회에서 노동이 상품화 되지 않고, 노동을 비롯한 상품의 교환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전문직이란 것은 생겨나지 못 했을 것이다.
시장의 확대가 전문적 생산방식, 또는 전문 생산품에 의한 분업을 촉진하고, 분업은 다시 시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 양자 사이에는 확대 피드백이 진행되었다. 노동시장이 없었더라면 전문적 운동선수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동은 糧食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는 운동행위를 생산하여 이 생산물을 양식과 교환한다.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스포츠의 상업화'를 스포츠의 저질화와 동의어로 쓰려는 담론이 있다. 스포츠가 상품적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띤다고 해서 스포츠 자체의 성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진주가 상품화된다고 하여 진주의 품질을 가름하는 美的 기준이 변질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업화 때문에 이미테이션 진주, 양식 진주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품위 천연 진주가 품질이 떨어지게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물건이다.
시장에서는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려 들기도 하고 싼 것을 비싼 값에 팔려는 기도도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가짜와 진짜, 싸구려와 고가품을 판별하는 기능도 시장이 가장 잘 수행한다. 관객은 더욱 스포츠 다운 스포츠를 관람하고 싶어한다. 아마도 '역사의 종언'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성장과 상품화의 진행이 끝나는 날이 아닐까 싶다.
강위석 (월간 에머지새천년 편집인)
출처 - 월간 메머지새천년 4월호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