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국 모델의 허와 실

1. 들어가며

외환위기 이후 영미식 글로벌 스탠다드 규범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세간에서는 한국이 강대국의 시스템을 수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 대안으로 '강소국 모델'을 논의하기도 한다. IMD가 발표한 2001년 가경쟁력지수에 의하면 핀란드(3위), 룩셈부르크(4위), 스웨덴(8위), 스위스(10위) 등 강소국의 순위가 높다. 작지만 강한 이들 국가의 특징은 국내시장이 협소하고 지하자원이 빈곤하다는 점으로 한국의 여건과 매우 흡사하며 따라서 미국이나 일본, 독일보다 강소국들이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소국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원인으로는 강소국이 발전시킨 산업전략과 노사정위로 대표되는 조합주의 등 사회적 형평성에 기반을 둔 경제성장 모델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자원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므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미래산업을 육성한 강소국의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소국들은 협소한 국내시장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수출에 주력하는 경제구조를 선택하며, 고유의 브랜드와 기술력을 가진 소수의 대기업이 강소국 경제를 주도하는 경향이 크다. 네델란드는 유통 물류, 전자화학분야 등에 집중하며, 스웨덴은 정보통신, 기계분야, 스위스는 정밀기계, 금융, 화학분야, 핀란드는 정보통신에 집중하는 등 주력산업을 선별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폈다.

선택과 집중전략에 성공한 대표적 예로 핀란드의 노키아를 들 수 있다. 휴대전화 제조업체인 노키아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35%이며 핀란드 주식시가총액의 50%, 제조업 고용의 3분의 1, 매출액은 전체 GDP의 24%, 수출의 23%, 연구개발은 국가전체의 20%를 차지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핀란드 경제에서 노키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다는 것과 외국자본의 유입이 핀란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경우 노키아의 과도한 경제적 집중과 노키아에 대한 외국인 지분증대 현상에 대해 그리 큰 염려를 하고 있지는 않으며 소유권과는 상관없이 핀란드 경제에 기여하는 기업은 핀란드기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물론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자국기업에 유리한 기업지배구조인 차등의결권을 통해 자국민들이 의결권이 많은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해외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해 온 것은 강소국의 독자적 발전모델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법은 유럽연합의 발전으로 인해 그리고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점차 폐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한국경제의 경제력 집중과 외국 자본의 영향력 증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며 강소국 모델이 보여주는 근본적 특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함을 반영한다.

2. '선택과 집중' 전략: 강소국 모델의 허

강소국 모델은 과연 한국에 어떤 함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강소국 모델의 특성은 '선택과 집중' 전략 그리고 정부의 역할과 클러스터 접근방식을 들 수 있다. 강소국 모델이 세간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김대중 정부출범 이후 한국이 수출 산업육성을 포함해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과연 21세기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갈 주력산업이 무엇이냐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강소국모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IT산업이 아직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고, 전통 제조업은 몰락위기라는 염려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소국모델이 우리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는 경제구조가 재벌위주의 산업구조로 집중되어 왔으며, 재벌의 비관련다각화가 기업의 경쟁력 약화현상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1980년 이후 업종전문화 정책 및 1990년대의 빅딜을 통해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업 맞교환 프로그램을 추진한 바 있지만 정부의 인위적, 강압적 조정에 의해 많은 경우 성공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 왔으며 아직도 재벌의 비관련 다각화 현상은 줄어들고 있지 않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앞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 나아 가야할 방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한국에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우선, 강소국인 핀란드의 인구규모는 517만 명, 스웨덴은 890만 명, 싱가포르는 370만 명, 덴마크는 530만 명, 스위스는 1000만 명인 반면, 한국은 4600만 명으로 프랑스(5900만 명) 독일(8200만 명) 영국(5900만 명) 그리고 이탈리아(5600만 명)에 비견된다는 점에서 소국이라고 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국가의 경제운영전략을 마련할 때는 당연히 이와 같은 경제규모를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현재 수출 경쟁력이 있는 품목을 보면 반도체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철강 정보통신기기 등으로 이들 품목의 수출이 한국경제를 유지해 왔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세계시장에서 1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제품이 독일이 669개, 미국이 618개, 일본이 354개, 대만이 206개에 비해 한국은 55개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치에서 보면 한국과 같은 규모의 나라에서 지금보다도 적은 품목으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기보다는 보다 많은 품목이 있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기존의 전통산업 영역의 지속적 고부가가치화를 배제한 어느 특정 영역에 대한 선별적 선택과 집중 전략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점을 반영할 수 있다. 과거 1960년대 경공업육성, 1970-80년대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처럼 선별적 선택과 집중 전략은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동시에 정경유착과 경제적 비효율을 가져온 폐해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구조가 복잡해진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선별적 선택과 집중 전략은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킬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정부는 1990년대 IT산업 및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진흥정책에 초점을 두었으며 최근에 이르러 IT, BT, NT 산업지원을 위한 신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벤처산업에 대한 지원은 벤처거품과 정경유착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진정한 의미의 벤처산업 육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특정분야 집중의 산업정책, IT, BT 나노기술(NT) 집중육성의 신산업정책은 선진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영역이며 이에 집중된 지원책은 자본 및 기술부족의 상황에서 실패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 국가의 산업발전을 한 산업에 치중했다가는 경제가 외부 충격에 너무 취약해질 수 있다.

한국의 수출산업구도가 IT산업에 치중되기 보다 자동차 조선 반도체 석유화학 등 전통산업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하고 있다. IT 산업이 경기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한국이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국가와 비교해 볼 때 그나마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경우, IT외에 전통산업의 경쟁력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IT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기존 전통산업영역 자체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선택과 집중' 전략과 차별화 될 수 있는 '전통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함께 강조하는 전략은 산업기반을 확대한다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첨단산업과 연계되지 않는 전통산업을 흔히 '사양산업'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예들 들어 1970년대 중화학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섬유산업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면서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섬유산업은 1980년 중반이후 지속적인 무역흑자를 보일 정도로 꾸준한 성장세를 지켜왔으며 산업자체내 자발적인 구조조정, 산업합리화 과정을 거쳐 첨단소재로의 영역을 넓히는 등 고부가가치화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국내 산업전반에서 섬유가 차지하는 비중도 막중하며 한국 전체무역흑자의 절반 이상을 섬유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사양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던 전통산업의 고부가가치화 노력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의 버팀목이 될 수 있으며 고용창출 및 균형적 산업발전을 위한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이다.

3. 정부의 역할: 강소국 모델의 실

강소국 모델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구조의 집중이라는 선택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선택이 성공적으로 작동될 수 있었던 경제환경 및 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장조성자로서의 정부역할과 클러스터 모델이 그것이다. 강소국 정부는 민간부문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며 룰을 정하고 민간부문을 리드하는 '협력자' 또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그친다. 이는 비단 강소국의 경우에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델이라기 보다는 최근 세계화 및 정보화시대에 이르러 자본주의 발달과정이 보다 고도화되고 성숙된 상황에 있어 보편적으로 요청되는 국가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John Dunning에 의하면 세계화는 국가역할을 축소하는 논의보다, 오히려 효율적인 국가역할의 중요성을 이끌어내는 환경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구조가 보다 고도화되고 복잡하게 됨에 따라 경제행위와 연관된 거래 및 조정비용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국가의 역할은 중요하게 등장한다. 자본주의체제가 아담 스미스의 "entrepreneurial capitalism"(1770-1875)이었을 때는 시장이 자본배분의 적절한 기제역할을 했지만, "hierarchical apitalism"(1875-1980)시대에 이르면 기업내 내부거래의 증대에 따라 기업간 불공정거래가 확산되었으며 이를 규제하기 위한 정부간섭이 정당한 거버넌스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alliance capitalism"(1989- )시대에서는 세계화 확산에 따라 보다 다양한 거버넌스 기제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정부도 시장기능 활성화를 위한 중재자, 감시자, 혁신체제의 창조자로서 그 역할이 변화되었다.

강소국의 경우, 비록 정부가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진해 왔지만 정부역할은 매우 시장조성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핀란드의 경우 기존의 산업별 접근방식(sectoral approach)에서 클러스터 접근방식(cluster approach)으로 전환하였다. 핀란드의 통상산업부는 1993년 국가산업전략을 수립해 정보통신 금속 에너지 화학 등 8개 산업을 집중 육성한 바 있으며 정보통신분야에 매년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51%를 투자하였다. 핀란드정부는 ICT(Intellectual Communication and Technology) 클러스터를 통해 민ㆍ관ㆍ정에 밀접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산학연구 협동체제를 발전시켰다. 중요한 것은 많은 중소기업을 대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산업클러스터에 연계시켰다는 것이다. 정보통신 클러스터에는 3000여 개의 중소기업이 존재하며 이중 노키아의 1차 하청업체만 3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강소국에 외국자본이 몰리는 이유는 산ㆍ학ㆍ관 협력체제에 의한 연구개발체제, 고급기술인력, 잘 발달된 사회간접자본, 인근 EU국가로의 진출을 위한 물류기지 제공 등 다양하다. 클러스터 접근방식은 어느 특정 집단에만 유리한 정책을 넘어서서 다양한 산업집단을 정치적 차원에서 아우를 수 있는 이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경제적 효율성과 균형적 지역발전을 통한 정치적 합리성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4. 나가며

한국경제를 움직였던 재벌중심의 산업구도의 폐해와 그 대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경제의 신산업을 주도할 것이라 여겨졌던 IT 중심, 벤처기업 중심으로의 경제구조 이행도 그 한계에 봉착했으며 과연 21세기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주력산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소국 모델이 주는 함의는 중요하다. 강소국이 선택한 산업영역의 집중전략은 세계화시대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부역할의 작동하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선택과 집중' 전략과 전통산업의 고부가가치화 전략이 서로 상반되는 이분법적 차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정된 자원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은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균형적인 산업발전을 위한 기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기존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가져 왔던 폐해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경제의 불균형발전 해소와 사회적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논리를 21세기 미래 산업발전 전략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강소국이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의미한다. 국가경쟁력은 국가가 자국내 기업에게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리한 경영환경 및 제도적 틀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세계화시대의 새로운 정부역할은 이러한 시장원리 작동을 위한 조성자, 협력자, 감시자로서의 강한 역할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저자 - 임혜란
출처 - 미래전략연구원 2002/04/09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