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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물이 아니다
2002-10-30
물은 물이 아니다 정상적인 성인은 하루 2ℓ 가량의 물을 필요로 한다. 이 가운데 약 절반은 음식을 통해 해결되지만 나머지는 일부러 마셔야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 누구라도 마셔야 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하지만 먹는 일과 마찬가지로 마시는 행위 역시 절대로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행동은 아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식수원은 강이나 호수.계곡.우물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으며, 산업사회 이후에는 상수도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됐다. 하지만 요즘 수돗물을 마시는 물로 생각하는 이는 우리 주변에 별로 없다. 환경오염 탓에 식수 하면 곧 '생수'를 떠올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공식적으로 '광천음료수'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생수 역사는 아직 10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 80여개의 생수업체가 연간 수천억원 대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페트병에 담긴 생수는 이제 생필품의 지위를 확실히 다졌다. 사실상 우리 주변에 생수병이 돌아다니지 않는 곳은 별로 없다. 수재민 구호품 리스트에서도 생수가 빠질 리 없고 각종 대규모 대중집회에서 가장 먼저 챙기는 것 또한 생수다. 차량정체로 도로가 막힌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생수 장사이며 지난번 부산 아시안게임 막판에 북측 응원단이 남측에 손을 벌린 것 역시 생수였다. 마시는 물이 달라짐에 따라 당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 음수(飮水)문화다. 태초에 사람들은 혀나 손으로 물을 마셨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바가지나 두레박 등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 각종 잔이나 대접이 등장하면서 주전자나 수도꼭지에 입을 직접 갖다 대는 행위는 점차 천박해졌다. 또한 같은 물이라도 이 빠진 사기 그릇이 아니라 크리스털 글라스에 담길 때 훨씬 고급스러워졌다. 이로써 물에도 과연 신분과 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생수의 급속한 보급은 물의 귀천을 점차 타파하고 있다. 1994년 3월 이전 국내에서 생수 시판이 허용되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먹는 물을 둘러싼 계층간 위화감을 걱정한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계층이 생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평등한 세상이 된 것이다. 식수와 생수가 등식화하면서 생수병 주둥아리는 이제 직접 빨아도 별로 큰 흉이 아니다. 공자와 논어를 가르치러 나온 철학자 김용옥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물 잔을 따로 사용한 적이 없다. 그리고 요즘 웬만한 회의장이나 세미나 모임에서는 화려한 찻잔이나 우아한 물병 등이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를 페트병 생수가 차지하고 있다. 굳이 그 모임의 격조를 판단하려면 생수병 옆에 컵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그것이 유리컵이냐 종이컵이냐 하는 정도를 살펴볼 뿐이다. 대한민국 국회 역시 생수의 국민적 이용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중순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천용택 의원이 하순봉 의원을 향해 손에 집어든 '무기' 역시 생수병이었다. 물론 생수 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무작정 반길 수만은 없다. 당장 그것은 오염된 지구환경을 웅변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인류역사가 이룩한 문명의 진보를 외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물 마시는 행위가 점차 획일화하고 있는 가운데 음수에 연관된 사회적 품위와 문화적 품격 또한 하향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수문화 나름의 긍정적 효과는 분명히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물이라는 점에서 생수는 일단 사람을 위계적으로 차별할 수 없다. 또한 술이나 차와는 달리 자작(自酌)을 원칙으로 하는 생수문화에는 형식주의와 권위주의가 끼어 들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생수를 서슴없이 마실 수 있는 분위기를 확보한 모임은 가식 없는 대화나 격식 없는 토론을 진행하는 데 훨씬 더 적격이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청와대 국무회의장에 페트병 생수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사실은 다소 유감스럽다. 사실 그곳은 생수는커녕 찻잔조차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다들 열심히 대통령 말씀을 귀담아 듣고 받아쓰느라 시험치는 교실처럼 긴장된 모습뿐이다. 국민이 바라는 바는 그와 같은 엄숙주의가 아니라 국정 현안을 치열하게 논의해 달라는 것인데, 행여 자유로운 생수 음용이 국무회의의 생기 발현에 기여하면 어떨까. 全相仁 (한림대 사회학 교수) 출처 - 중앙일보 2002. 10. 30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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