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자유주의에서의 금융감독

정부의 것은 정부에게, 시장의 것은 시장에게.  

지난달 나에게는 어느 학술회의에서 글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다. 발표할 글의 제목은 '경제위기와 시장경제의 발전: 역사와 현실'이었다. 나는 이 제목에 '자유주의'라는 수식어를 첨가하여 '경제위기와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으로 약간 바꾸었다. 나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토론 시간에 정부측에서 나온 논평자가 우리경제가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진행하는 것은 異見이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논평자의 의견을 논평하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완곡하게 말했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경제를 어떠한 형태로 조직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우리 정부가 시장경제를 표방하였다지만 어느 시장경제인지는 누구도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이 내가 제목을 바꾼 이유였다.

무슨 시장경제를 지향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중대한 사건이 지난 4월에 일어났다. 금융감독 체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은 현 정부의 경제관을 시험해 보는 좋은 시금석이 되었다. 현 정부는 유세 때부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내걸었다. 그런데 시장경제에는 시장자본주의market capitalism와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가 있다. 현 정부는 어느 시장경제를 지향하는가.

90년대 초에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사회주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접목을 시도한 소위 시장사회주의라는 이름의 경제체제는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인 약 100년 전에 바론E. Barone이라는 학자에서 비롯한다. 그후 랑게O. Lange와 하이에크F. Hayek 사이의 논쟁과,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차례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시장사회주의의 내용도 변했다. 현재 그 선봉은 버클리 대학의 바단P. K. Bardhan이다. 그는 정부가 금융을 장악하고 이를 통하여 산업을 지배하는 것이 현대 시장사회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 이유의 목록은 사회주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득분배, 외부 非경제, 독점, 기술진보 등에 대한 시장의 실패 때문이라는 케케묵은 이유이다.

이에 대한 비판의 선봉은 하버드 대학의 슐라이퍼A. Shleifer이다. 정부가 항상 선의만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실증 연구를 통해서 수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곧잘 사회주의의 전형이라는 스웨덴을 예로 들어왔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심사위원이며 스웨덴 경제정책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린드벡A. Lindbeck 등은 스웨덴이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간섭으로 위기를 맞았고 현재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복귀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 보다 시장사회주의자들이 이유로 내세운 것들은 이미 이론적으로도 실증적으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간단한 관찰을 해 보아도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후퇴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지 있는가.

시장사회주의자 주장의 대전제는 정부(관료조직)가 효율적이고 선의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을 장악하는 것은 선의에 의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가 우리 모두를 불의로 안내할 수 있다는 서양속담(The road to the hell is well paved with a good will)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옳은 일이니 외롭더라도 강행하자.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옳다는 것은 토론을 거쳐 검정이 되어야지 혼자 옳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아 정부의 목적과 시장의 목적은 다르다는 점이다. 시장의 목적은 사적으로는 참여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는 것이지만, 정부의 목적은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득표수를 최대화하려는 것이다. 관료조직의 목적은 규모의 극대화size maximization이다. 금융의 장악이 선의로 이용되는 것은 정부의 목표와 시장의 목표가 일치할 때 만이다.

그러나 이 두 목표가 충돌할 때 정부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최우선으로 극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이때 금융의 장악은 권력의 극대화의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다. 정부가 탐탁하게 생각하는 기업에게 대출을 베풀어주리라고 생각하는가. 더욱이 평소 비협조적이라고 생각되는 기업에게 선거 철에 대출이 순조롭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화폐를 교란하는 것이라고 한 레닌의 주장은 금융의 장악이 얼마나 가공할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준 좋은 예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적이 교란할 무기를 아예 무력화시키려고 금융을 없애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예 금융을 공산당이 독점해 버렸으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무서운 재앙은 전쟁 다음으로 금융공황이다. 자본주의가 해결을 못하고 반대자에게 빌미를 주어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금융공황이다. 이만큼 금융은 다루기가 어렵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분야이다. 멀쩡한 기업이 몇 푼의 운영자금이 없어서 쓰러지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이것을 고도의 기술도 없는 정부가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비효율적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정부가 잘 모르는 혈액은행을 모두 정부 소유로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정부에 친하지 않은 사람은 사고를 당해서도 안되고 아파서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금융은 혈관과 마찬가지이다. 중앙은행은 심장이고 자금은 혈액이다. 이것을 정부가 장악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이다. 금융위기 이후 현재 한국 정부는 많은 은행의 대주주가 되었다. 다가오는 선거 철에 그 많은 정치자금이 어떻게 마련되는지, 그 과정에서 금융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하는 것은 여전히 베일에 가릴 것인가.

현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금융자본주의 성격이 강하다. 더욱이 증권시장 중심의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시장경제의 가장 중심에는 주주의 이익이 자리 잡을 것이다. 소비자 주권은 곧 주주 주권으로 발전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주주제도가 더욱 번성할 것이고 그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금융상품이 발명될 것이다. 이러한 전망 하에서 보면 기업의 자금조달은 은행중심에서 증권시장 중심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정부가 은행을 장악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증권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가 증권시장을 장악하려면 기업의 지배구조를 장악하는 것이 순서인데 이것은 기업을 위축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조치를 이런 맥락에서 예의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금융을 장악하여 실물경제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발상은 비현실적이고, 설혹 현실적이라고 하더라도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다. 정부가 시장에 비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연구결과는 부케넌J. Buchanan과 털럭G. Tullock 이후 수없이 많다.

100여 년 간 계속되어 온 논쟁에 비추어 보면 현 정부는 분명히 시장사회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금융을 장악하기 가장 쉬운 체제가 금융감독 업무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그 체제를 정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업무를 금융감독위원회로 이관하려는 현 정부의 발상이 바로 바단에 의하면 현 정부가 시장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슐라이퍼의 실증분석에 실패한 좋은 예를 또 하나 추가해 줄 것이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민간기구이고 금융감독위원회는 정부기구이다. 민간의 경제행위를 정부가 감독한다는 발상은 현대 자본주의 정신에 위배된다. 정부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국민에게 서비스하는 기구이다. 이 경제적인 서비스 기구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독하라고 "정부 內"에 감독기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이 감독기구는 어디까지나 국민을 대신해서 정부의 서비스를 감독하는 것이지 거꾸로 민간을 감독하라는 것이 아니다.

금융행위는 민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이다. 시장행위이다. 그것을 감독하는 기구 역시 시장행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연히 민간기구이어야 한다. 민간의 시장행위를 정부가 감독한다는 것은 시장경제를 장악하겠다는 의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것은 가격기구를 정부의 수중에 넣겠다는 것이고 시장에서 가격기구를 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현 정부는 의료보험과 교육이 왜 파탄이 났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바로 의료시장과 교육시장에서 가격기구를 빼 버리고 이들 시장을 정부가 장악하려는 시장사회주의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사회주의자라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금융감독을 정부가 하라. 그리고 실패하라. 그러나 사회주의자라는 명찰이 싫다거나 정말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면 금융감독은 민간기구로 발전해야 한다.

세상은 점점 시장자본주의로 움직이고 있고 이 대열에서 낙오하면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또 현재 학문적인 대세도 시장사회주의 하에서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부가 시장을 장악하는 목적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데에 있다. 시장사회주의의 선봉자 바단도 이 점을 몹시 우려하여 여러 가지 고안을 내놓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고안이 운영 차원에서는 노동자와 상호금융의 대표가 은행 경영을 맡고, 정부, 연금기금, 보험회사가 은행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정부에 의해서 오용될 소지는 헌법차원에서 금융부문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가 전혀 없는 우리가 그렇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우리 나라에서 헌법은 누가 만드는가. 그리고 기소권을 가진 검찰을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꿈 같은 소리이다. 근본적으로 이 같은 시장사회주의는 금융행위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므로 자본주의 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조세권은 정부에 귀속된다. 그러나 조세를 낳는 경제활동은 시장에게 귀속된다.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가르친 이후 아직도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지 않고 있듯이, "정부의 것은 정부에게, 시장의 것은 시장에게" 라는 원칙이 아직도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조세, 검찰뿐만 아니라, 금융까지 장악하여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거꾸로 진행하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할 수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시장경제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고 이러한 이유만이라도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전도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김학은 /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중앙일보 에머지 2001.08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