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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천지 된 우리 방송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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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3 |
| 무법천지 된 우리 방송언어 우리는 흔히 북한 사람들은 주체성이 강해서 외래어를 배격하고 한국어의 순수성을 지켰다고 알고 있는데, 북한에서 방송 관계 일을 하다 탈북한 인사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서도 50·60년대에는 지식층들은 말 끝마다 과시적으로 러시아어를 섞어 썼다고 한다. 그리고 방송국 아나운서들도 서울 말씨에 가까운, 부드럽고 상냥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1966년에 김일성 주석이 러시아어 단어를 쓰는 것이 ‘돼먹지 못한 짓’이라고 엄하게 금지를 시켰고, 아나운서들의 말씨도 나긋나긋한 말씨가 역겹다며 원래의 이북 억양을 쓰도록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부터 북한 동포의 말에서 러시아어 어휘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서울 말씨에 가까운 억양을 쓰던 아나운서들이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언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언어를 통제하는 일은 웬만큼 공포심을 불어 넣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입법으로도 호령으로도 국민의 언어를 다스릴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지만 그들 스스로 바르고 품위 있는 말을 씀으로 해서 국민의 언어생활뿐 아니라 의식을 한 차원 높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의 언어는 너무 거칠고 상스럽고 폭력적이다. 어휘만 저속하고 폭압적인 것이 아니고 내용 또한 논리가 닿지 않는 억지, 며칠도 못 가서 탄로날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모략 중상 투성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정치인이 국민의 삶의 조건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까지도 망치고 있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언어생활에 (불신과 혐오를 받는) 정치인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 매스 미디어, 특히 방송 매체이다. 그런데 우리의 방송 매체는 그 역할과 사명을 인식조차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언어 수준은 얼마든지 낮출 수 있다는 태세이다. 심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서로 ‘너 그랬냐’하는 식으로 대화를 하는데, 비록 두 사람이 반말을 하는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TV 프로그램에서라면 시청자를 존중해서 출연자들끼리도 서로 높임말을 써야 한다. 전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에서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속된 말, 하대어를 쓰지 않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이다. 필자가 지난 2년 동안 위원으로 일했던 ‘방송언어특별위원회’에서는 언론 매체의 국민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서 각종 TV 프로그램, 특히 오락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오·남용 예를 조사해 각 방송사에 거듭 시정과 향상을 종용했지만 어떤 방송사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속극 등에서도 비표준어, 비속어 사용 등 문제가 상당하지만 심야 오락프로그램의 언어에는 선정적이고 야비한 표현, 부정확하고 속된 발음, 엉터리 영어 남발 등 언어 오용이 위험수위를 넘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심야’ 프로그램이 아닌 ‘교양강좌’ 프로그램의 강사들도 방청객들에게 얼렁뚱땅 반말을 쓰고, 아예 하대를 하기도 한다. 방송프로에서도 거침없이 상소리를 구사하는 ‘학자’도 있다. 출ㆍ퇴근길에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들도 전과 다르게 가끔씩 반말투를 쓰곤 한다. 내가 퇴근길에 자주 듣는 어떤 프로그램의 나이 든 남자 진행자는 옛날부터 전화로 참가하는 청취자들에게 반말을 많이 했는데 요즈음에는 점점 심해져 존대보다 반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라디오고 텔레비전이고 연예오락프로그램에서는 반말과 비속어, 은어가 난무하고 있는 듯하다. 언어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시청자나 청취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런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국민의 언어생활은 천박해지고 상호 인격 존중은 사라져간다. 말을 아무렇게나 하고 살면 스트레스가 덜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막말이 일상화된 사회는 스트레스가 훨씬 심할 뿐 아니라 험악하고 불안한 사회이다. 막말이 일상화되면 얼마 안 있어 폭력이 일상화된다. 우리말을 바르게 지키는 것은 우리 심성을 지키는 것이다. 徐之文 (고려대 영문학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2. 9. 3 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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