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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성 스스로 훼손한 검찰
2002-08-26
중립성 스스로 훼손한 검찰 “거악(巨惡)이 편히 잠들게 하지 않겠다.” 검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신임 서울지검장의 취임 일성(一聲)이었다고도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법과대 학생들이나 사법연수원생들로 하여금 얼마나 가슴뛰게 하는 호기어린 다짐인가. 단지 호기에만 그치지 않고 결과물을 풍성하게 쏟아내기도 한다. 검찰의 끈질긴 추궁 앞에 끝내 무릎을 꿇은 거대한 불의(不義)들이 기나긴 불면의 밤을 지샌 끝에 줄줄이 엮여가는 모습들을 숱하게 보아 오지 않았는가. 검찰이 아니면 감히 손대기 힘든 이런 부정, 저런 비리와 이런 폭력, 저런 추문같은 구조적인 부조리가 들춰지고 단죄되는 가운데 우리가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 또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멀리 되돌아갈 것도 없다. 제5공화국, 제6공화국 시절 이른바 ‘육법당(陸法黨)’ ‘검찰공화국’이라는 조어 속에 등장하는 검찰을 상기해 보라. 정치 권력과 일부 검찰이 동거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검찰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육사 출신 정치 엘리트와 결합한, 정확히는 그에 충실히 복무한 일부 검찰 엘리트는 정통성 결핍에 허덕이는 전자에게 형식적 합법성의 외피를 궁리해 줌으로써 정치 권력의 일부를 분배받을 수 있었다. 전자가 퇴조하는 시류 속에서는 전면으로 부상하여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실질적인 법치주의의 열망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민간정부 아래에서 검찰에 대한 우리의 바람은 아주 간명하였다. 정치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라. 정치 권력의 일부가 아니라 오직 준사법권의 충실한 집행자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민간정부 10년, 그러한 기대는 아직도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또다시 정국을 뒤덮고 있는 기획수사, 표적수사의 항변들, 이들이 바로 그 중립성 훼손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기획수사가 시비가 되고 표적수사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악과 맞닥뜨리는 것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결과가 아니다. 주도면밀하게 기획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다음 집요하게 표적을 겨냥하며 정면대결을 펼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획수사이고 표적수사이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기획의 수립이나 표적의 설정은 어디까지나 거악을 척결하려는 순수한 의지에서 나온 검찰 고유 판단의 산물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정부의 의지, 여론의 요구, 어느 집단이나 단체 또는 개인의 의견도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로지 국가적 차원이나 공익적 견지에서 내린 검찰의 독자적인 판단이 중심에 서야 한다. 어느 특정한 정파, 집단 또는 개인의 이익이 더 많이 고려된다면 어떻게 중립성의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이른바 ‘병풍’수사와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기획수사, 공작수사의 의혹은 과연 무엇인가. 야당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의 교체를 요구하다가 급기야는 이를 거부하는 법무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여당 중진의원의 실언성 실토에 비추어보면 야당의 문제 제기가 무리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야당의 교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의혹을 인정하는 것이며 정치권의 부당한 압력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검찰의 응수는 당당하지도 능란하지도 않다. 그저 완고해 보일 뿐이다. 늦기는 하였지만 이제라도 겸허하게 천명하라. 아무런 편견없이 병풍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그나마 절차의 하자를 치유하고 훼손된 중립성을 회복하겠다고.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의혹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로 지목받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수사의 결과가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실체 없는 정략이니, 실체 있는 거악이니 하며 정쟁으로 지샐 것은 불문가지이다. 어차피 같은 검찰이 하는 일이 아닌가. 수사진을 바꾸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는 금도가 아집보다 우선이다. 수사진을 교체한다고 하여 결론이 달라진다면 거악은 이제 안도한 가운데 깊은 숙면에 들 것이다. 박인제 (변호사) 출처 - 문화일보 2002. 8. 26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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