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살릴 새정치를

최근 수개월간 한국경제는 신나는 소식을 많이 들었다. 한 예만 들면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가 2003년 말에는 한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일본과 동등한 신용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을 발표했다. 맞고 틀리고야 두고 볼 일이지만 싫지는 않은 소리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앞날이 그렇게 밝게만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나라의 경제가 잘 움직이려면 생산능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되는 동시에 수요도 그에 걸맞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지난 4년간 한국경제는 1997년 위기 이전에 구축한 생산시설을 이용하면서 처음에는 미국의 호황에 기인한 풍부한 수출 수요로, 최근에는 폭발하는 소비수요로 그럭저럭 견뎌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미국 경제의 장래가 불투명해 수출수요가 부진한 가운데, 국내 소비수요 또한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한국경제가 활력을 찾으려면 투자의 증가가 필수적이다. 투자는 수출, 소비와 함께 수요의 주요 구성 요소일 뿐 아니라 생산능력을 증대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따라서 투자가 늘어날 길은 없을까 진지하게 생각할 때이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기업에 각종 특혜를 주어가며 투자를 권유할 수는 없다. 특히 중복(重複) 과잉투자를 일삼다가 경제위기시에 혼쭐이 났던 기업은 좀처럼 투자를 하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인하와 같은 정책적 대응보다는 이런 저런 불확실성을 줄여줌으로써 기업가의 투자의욕을 북돋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 상황은 아직도 경제의 불확실성을 늘려주기만 할 뿐이다. 갖가지 ‘게이트’가 난무하는 가운데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국익보다는 눈앞의 당리당략에만 몰두하여 온갖 폭로와 비방을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선거철에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정치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국민경선제 도입 등으로 기존 정치의 틀은 많이 무너지고 한국 정치에 창조와 파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또한 정치권에서는 보수연합, 진보연합과 같은 구상이 등장하였다. 정치권에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아무런 정체성도 없는 정당들이 쉴새없이 연출해 온 불모의 정쟁에 신물이 난 우리들은 이러한 다양한 시도에 무언가 희망을 걸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국민의 열망을 담아낼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다가 보수 대 진보의 양분법이 국민의 편을 가르고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는 정쟁을 유발한다면 국민은 절망에 빠지고 누가 정권을 잡아도 정치는 대단히 어려워질지 모른다.

보수도 진보도 진정한 개혁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낡고 병든 정치의 틀을 그대로 둔 채 보수와 진보를 외친다 한들 무슨 메아리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깨끗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구현함으로써 편안하고 밝고 화목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국민들의 소박한 요구이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창조를 위해 국민은 정치권, 특히 정치지도자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너무나도 상식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하나는 국민에게 정직하고 청렴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신념을 보임으로써 그들을 믿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덕성(德性)에 기초하여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전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민은 정치지도자가 지도자로서의 덕성과 식견을 스스로 갖추고 또 보여줄 것을 바라고 있다.

사회의 발전은 작은 상식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대통령은 ‘게이트’ 문제 처리에서 검찰과 사법부가 각각 대통령 부근 사람들의 비리를 철저히 파헤치고 엄정한 법의 심판을 하도록 해야 하며, 제1당인 한나라당도 누구누구를 처벌하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것 등을 삼가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새로운 정치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한국경제가 외국인의 평가에 걸맞은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정운찬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경제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5. 15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