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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만 신탁 사실은 강제처분
	2004-06-11
말만 신탁 사실은 강제처분 정부와 여당이 내년부터 시행하려는 고위공직자 주식 백지신탁제는 공직자 윤리 제도로서는 필요 이상으로 과격할 뿐더러 헌법에 위반되는 면이 많다. 행정자치부는 이 방침을 발표하면서 처음에는 현 국회의원에게도 적용하겠다고 했다가 소급입법이라는 논란이 일자 차기 국회부터 적용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는 충분한 검토도 없이 새 정책을 준비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제도는 공직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현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사실 부유한 사람이 정부 고위직에 진출하기 쉬운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또, 그런 과정을 거쳐 부유한 사람들이 더욱 부유해져서 적잖은 논란을 일으킨 사례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프 케네디는 루스벨트행정부의 고위직을 지내면서 부(富)를 증식시켰다. 그가 영국 주재 대사를 지내면서 히틀러에 대해 유화책을 쓸 것을 주장한 것도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재산이 축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훌륭한 공직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요즘은 실물경제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라서 돈을 만져 본 사람이 국정 운영도 잘 하기 마련이다. 월가(街) 출신의 백만장자 로버트 루빈이 클린턴행정부에서 재무장관 노릇을 잘 한 것이 좋은 예다. 중요한 것은 공직자가 얼마나 부자인가가 아니라 업무 수행시 개인적 이해에서 초연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공직자 윤리 제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데, 우리의 현행 제도는 이 같은 이해 충돌을 예방하는 데 충분치 못하다. 만일 전자산업을 관장하는 공무원이 관련 기업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면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 있어, 이런 경우 당사자가 기피하게 하는 등 예방 장치를 둬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장차관 등 고위공직자의 경우다. 이들의 업무는 광범하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주식을 갖고서는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할 수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정의 모든 분야를 관장하기 때문에 업무를 기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은 취임과 더불어 주식을 처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재산을 처분토록 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일 뿐더러 단기간에 처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백지신탁이다. 미국의 경우는 1978년에 제정된 정부윤리법에 이를 규정하고 있다. 주의할 점은, 미국은 결코 공직자에 대해 재산 처분이나 백지신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경우 백지신탁 외에는 적절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백지신탁은 정부 윤리를 관장하는 관청의 허가를 받아 시행되며, 전문 금융회사가 재산을 맡아 관리하고 공직자는 신탁재산을 소유는 하되 이에 대한 통제권은 상실한다. 백지신탁은 재산권을 존중하면서도 이해 충돌을 예방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번에 행정자치부가 내놓은 공직자 주식 백지신탁 제도는 고위공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재산 처분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경우와 구별된다. 주식을 넘겨받은 금융기관은 이를 단기간에 처분토록 했으니 말만 신탁이지 사실은 강제처분인 셈이다. 반면, 실무 공무원이나 위원회 위원에 대해선 규제를 두지 않아 이들의 이해 충돌 문제는 방치돼 있다. 재산공개 의무가 없는 실무급 공무원이 민원 업무를 직접 관장하고 있어 부패의 소지가 더 많음에도 말이다. 공직자의 부정은 갈수록 교묘하게 이뤄지고 있어 주식 보유만을 특히 문제삼는 것도 현명치 못하다.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의원 취임 전인 2000년 12월 한 출판사와 거액의 선인세(先印稅)를 받고 자서전 출판계약을 했는데, 그 출판사의 모기업은 방송사와 통신 업체를 갖고 있어 그 후 이해 충돌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공직자윤리 제도가 취약한 부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4. 6. 1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