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2002년 4월 11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주최로 열린「고교평준화 이대로 좋은가?」라는 심포지엄의 발표논문입니다.

고교평준화 찬반논쟁이 내포한 논점의 혼란과 오류

金亨基/조선일보 논설위원

1. 서 론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모일간지에 실렸던 고교 평준화 관련 기사 한편을 발췌 인용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아둔하게 대처해서는 안된다. 얼마전 「사학의 활성화」 세미나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우리는 골똘히 재음미 해보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학생들의 학교선택권을 봉쇄하여 「제비뽑기」로 학교배정을 하고, 공-사립간 일정액의 공납금을 일률적으로 받게 한 이른바 「고교평준화」시책이라는 것이 강행됐다. 한 세미나 발제자는 『이 문제는 지금까지 하나의 성역으로써 논급조차 꺼려왔으나, 관학과 사학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교육제도에 관하여 진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한 전문가는 『노력과 능력이 반영되는 경쟁식 입시제도의 환원과 학생선발권을 학교로 되돌려주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최근 중고교 보충수업 방안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다. 「보충수업」은 평준화시책 강행 이후 학력이 하향 평준화했다는 세계교육사에 일찌기 듣지못한 기막힌 중후 양상이 심각히 여론화 함으로써 취해진 땜질 조치이다. 국가 백년대계를 땜질수법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땜질 아닌 본격 궤도로 되돌리는 용단을 내려야 할 때다. 일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단계인지 그 이상의 단계인지, 국제경쟁에서의 도약이 보장돼야 할 방가(邦家=국가?필자 주)의 앞날을 위해 걱정이 태산같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 1984년6월24일자에 「더 늦기 전에?. -고교 평준화 10년이 빚은 실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게재된 글이다. 놀랍게도 이 글은 요즘 도하 언론에 등장하는 고교평준화 비판 기사나 논설들과 구별이 안갈 정도로 닮아있다. 시점을 밝히지 않으면 바로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 난 기사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치 않을 내용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고교 평준화제도가 시작되자마자 지금까지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돼왔다는 점,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평준화가 안고있는 문제점들은 비교적 분명한데도 그것이 전혀 고쳐지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유지돼왔다는 사실이다.

고교 평준화는 이른바 중3병, 일류병, 입시지옥, 과열과외붐, 학생들의 건강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1974년 고교 신입생부터 전격 도입됐다. 그와 동시에 평준화에 대한 반대와 비판도 시작됐다. 평준화작업의 어려움, 평균학력의 저하, 도시학생의 지방역류, 지방학생의 도시 전입, 사학의 운영난 등 예견됐던 문제점들이 속속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당장 평준화 첫학기인 그해 3월 국회가 이 제도의 보류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그것도 집권당인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에 의해서였다. 여당의원들은 귀향활동을 하면서 청취한 주민과 학교, 교육계의 여론을 토대로 당?정회의에서 평준화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정희 치하의 서슬퍼런 권위주의 시대에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정책을 비판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국회의 평준화 비판을 필두로 첫해 내내 『평준화가 고교입시 과열경쟁과 학교간의 우열격차 해소의 성과를 거두고 있어 계속 유지발전 시켜야 한다』는 찬성론과 『학습지진아 양산, 평균학력 저하, 사학의 운영난등이 두드러져 보완책 또는 제도자체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반대론이 맞섰다. 시행2년차인 1975년9월 유기춘 장관이 취임했다. 그의 취임일성은 『추첨배정 진학제의 전국확대실시를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유장관의 결정은 그가 광주에서 대학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렴한 교육계 의견과 문교부가 자체조사한 학력저하 실태를 반영한 것이었다. 문교부가 조사한 5대도시 평균학력은 45.1점이었다. 서울시내 한 고교의 학년별 평균성적은 평준화 전 66점에서 58점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이화여고등 서울 일부 고교가 학습지진아를 자퇴 또는 가진급시킨 것이 기름을 부었다. 이화여고는 22명의 학습지진아를 권고퇴학시켰고, 경기고 15명, 중앙고 161명, 경복고 60명, 경기여고 15명, 금란여고 12명을 가진급시켰다. 5대도시 학교 모두가 10~20%의 학습지진아들로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확대적용은 보류되고 5대도시의 추첨배정제와 기타 지역의 경쟁입시가 병존하는 고교입시제도의 기형적인 2원화가 시작됐다.

시행 3년째인 1976년2월에는 정부와 여당이 고교입시의 환원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의 전반적 실력이 저하되고 면학분위기가 크게 파괴됐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교입시 환원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평준화 확대는 중단됐다. 3년후인 1979년 정부는 평준화 지역을 기존의 5대도시에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를 포함한 12개도시로 확대했으나 그결과 학교간 지역간 격차 및 제도적 모순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자 81학년도 이후 고교평준화 확대를 전면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는 확대와 축소, 수정과 보완의 반복이었다. 1986년에는 교육감들이 고교입시를 시도별로 알아서 실시 할테니 문교부는 간섭을 하지 말라고 건의했다. 1988년 문교부는 90학년도부터 평준화를 폐지한다는 방침 아래 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했다. 1995년에는 이준해 서울시교육감이 서울의 평준화를 1998년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들어 그간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8년 비평준화 지역인 안양 군포 의왕 고양 등 수도권지역 시민단체와 학부모 모임이 평준화 도입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 이후 진행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2002학년도부터 평준화를 시행한다는 방침이 결정되면서 신도시의 서울 강남 전입러시가 일고 그것이 부동산 폭등에 일조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기도 일부지역의 학부모들이 고교평준화제도가 헌법상 보장된 교육을 받을 권리와 평등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냈다. 고교 평준화 찬반이 생각을 달리하는 집단간의 대립 양태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평준화제도는 도입 이후 28년간 끊임없이 찬반논쟁에 휩싸여왔다. 그 오랜 기간동안 평준화 찬반논쟁은 몇몇 제한된 논점을 두고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적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중 어떤 논점은 이미 유효성을 잃어버린 것도 있고, 어떤 논점은 성격상 애당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포함돼있다. 특히 90년대 들어 최근에 이르는 동안의 찬반논쟁은 순수한 교육논쟁의 틀을 벗어나 사회?경제적 이념이 충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글은 논점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평준화 찬반논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다. 혼란스러운 논쟁의 가닥을 잡아 핵심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평준화 찬반론의 4가지 논점

(1)과외병

박정희 대통령은 73년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고교입시 제도에 커다란 관심을 표시하고 그해 안에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해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2월28일 추첨에 의한 고교 배정안을 전격 발표했다. 민장관은 고교진학에 학군제를 도입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입시가 가지는 본래의 목적은 한마디로 학교교육에 적합한 학생을 선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동안 입시경쟁이 빚어낸 커다란 문제점은 과중한 학습부담과 경제부담 등 교육 본연의 목적에 역행하는 것들이었다. 국가 백년대계을 위한 교육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해 입시제도 개선을 단행한다. 』

민장관이 말한 과중한 경제부담이란 과도한 사교육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평준화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망국적 과외병으로 말미암아 적게는 한달에 5천원, 많을 경우에는 4~5만원의 과외수업료를 물어야 한다. 한달에 5~6만원의 수입을 가진 학부모가 비정상적인 교육비로 1~2만원을 지출하면 그처럼 커다란 부담은 없을 것이다. 사교육비는 연간 260억원에 이르며, 이를 저축으로 돌려 산업자금으로 쓸 수 있다면 10억짜리 공장을 26개씩 세울 수 있을 것이다.』 197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135억달러(당시 화폐가치로 5조3780억원), 일인당 소득은 394달러(16만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와함께 명문학교를 가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몰리는 데 드는 비용도 걱정했다.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박대통령은 『농가평균 소득은 30~40만원밖에 안되는데 자녀 한사람을 서울에서 공부시키려면 하숙비만 해도 17~18만원이 든다』면서 입시과열에 따른 맹목적인 도시집중현상을 개탄했다.

평준화의 중요한 취지는 망국적 과외병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면 평준화 도입 이후 과외병은 치료됐으며 국민의 과외비 부담은 줄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통계가 잡혀있는 77년 당시 과외비는 571억여원으로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7% 정도였다. 그러나 2001년 사교육비는 4222억원으로 GDP의 3% 정도이고 달러로는 약126억달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을 국제가격으로 모두 내다 팔 경우 16억달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전국의 농민을 7년간 먹여살릴 수 있는 돈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학교에 납입하는 입학금과 수업료의 3～4배를 사교육비로 사용한다. 대도시에 살면서 월 평균 소득이 1백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소득층 가정도 사교육을 받는 비율이 절반이 넘는다. 사교육비는 특히 90년대 이후 급증하는 추세인데, 1997년과 2000년의 사교육비를 비교해 보면 학원비는 2배로, 개인교습비는 10배 가까이로 뛰어올랐다. 심지어 3～12세의 미취학 또는 초등학생을 둔 가구의 월 평균 사교육비도 월소득의 9.8%인 23만3천7백23원(2000년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이른다.

한마디로 평준화는 망국적 과외병 해소는 물론 사교육비 부담 절감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교육비의 급증은 중등학교 교육의 부실화와 연계돼 있으며 중등학교 교육 부실화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평준화임을 상기하면, 평준화가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는 역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2)과열 입시

2000년 현재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비율은 99.5%이고 고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하는 비율은 68%다. 평준화제도를 폐지하면 고교 입시에서 다시 경쟁이 나타나 학생들을 과열입시의 지옥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게 평준화 옹호론의 입장이다.

학생이 한 학교에서 다음 학교로 진학할 때 일반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다. 우리는 일단 고등학교를 모두 진학시키고 본다. 이것은 모든 학생의 적성과 소질을 무시하고 「대학 예비학교」로 집어넣는 효과를 가져온다. 평준화 시행 이전에는 학업쪽에 흥미나 적성이 없는 학생들은 일차로 고교입시에서 걸러졌다. 그들은 실업계 학교를 가거나 취업의 길로 나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했다. 지금은 거의 무조건 일반계 고교에 진학하며, 어쩔 수 없이 실업고로 진학할 때에도 목표는 대학 진학에 둔다.

대학 진학율이 68%라면 경쟁률이 2대1이 채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에는 이미 일등에서 꼴찌까지 등수가 매겨져 있다. 서열 앞쪽의 대학에 가기 위해 모든 고등학생들이 필사적으로 입시경쟁에 매달린다. 고교 평준화는 입시의 고통을 3년간 유예하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과열입시를 없애는 데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오히려 좀더 일찍 입시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는 기회를 빼았는 측면도 있다.  

정부는 평준화의 보완책으로 영재및 특성화교육을 한다면서 과학고와 외국어고를 설립하게 했다. 그러나 과학고와 외국어고는 일류대를 준비하는 입시명문고로 전락해버렸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입시경쟁과 그 수요를 인위적으로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한발 더 나가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과열입시는 더 나은 지위와 명예와 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학벌을 추구하는 사회전체의 분위기와 맞물려있는 숙명적인 현상이다. 그것을 평준화라는 인위적 정책을 통해 없애는 것은 일시적인 물타기는 될지언정 사회현상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 고교입학 단계에서의 한차례 경쟁이 오히려 모두가 대학입학경쟁에 뛰어드는 소모적 경쟁을 분산시켜주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3)주입식 교육

평준화 옹호론자들은 평준화를 폐지하면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횡행하고 그로 인해 학생들의 창의성이 말살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평준화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 하는 것은 교육철학과 교육목표의 문제다. 평준화된 학교에서도 지식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할 수 있고, 비평준화 상황에서도 이른바 「창의성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주입식 교육의 대립항은 비주입식 교육이지 비평준화가 아니다. 따라서 이 논점은 평준화 찬반론에 있어서 대표적인 오류의 사례다.

학교붕괴, 교실붕괴, 교단붕괴 등의 사태를 가져온 것은 잘못 이식된 이른바 「열린교육」 이론이 빚어낸 참상이다. 지적 수준이 천양지차인 아이들을 섞어놓은 평준화가 여기에 일조했다. 『아무 것이나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거나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미적분을 왜 황금같은 고등학교 시절에 골머리를 쓰며 배워야 하느냐』는 저급한 실용주의가 어느 때 부터인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미적분과 삼각함수와 고차방정식을 모두가 다 풀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풀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지식과 산업의 기반을 이끌어갈 아이들은 수준 높은 학문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평준화 이전에는 이른바 일류고 아이들이 그것을 했고, 대학에 진학하고 유학을 가서 그 지식을 발전시켰다. 지금은 어떤가. 구구단을 못외우고 읽기?쓰기도 제대로 못하는 중고교 학습 부진아가 5만명이 넘는다. 서울대에서조차 우열반을 편성하고 기초수학 보충수업을 해야할 판이다.

우리네 학교는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학과지식의 체계적인 축적과 전달을 「주입식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무시한다. 늘 우리의 모델이 돼온 미국은 1930년대의 아동중심 교육, 60~70년대의 열린 교육, 90년대의 학생중심 교육 등이 추진되면서 교과서가 얇아지고 숙제는 줄어들었다. 경쟁과 비교의 개념을 학교에서 몰아내겠다는 평등주의 사고의 실천이었다. 그런 미국이 지금은 정신없이 변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력 신장이 최우선 교육개혁 목표로 등장한다. 전통적 지식중심 교육으로의 회귀를 꾀하며 숙제와 학습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시험기준이 강화돼 연례 진급시험에 실패하면 여지없이 낙제시킨다. 성적이 불량한 학교는 폐교처분까지 불사하겠다는 정부의 초강경책이 학부모들의 환영을 받는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주표준」 「국가표준」 등의 시험을 마련해 거의 모든 주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을 밀어부치고 있다.

창의성은 기본 지식이 없는 곳에서 돌발적으로 싹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관련지식을 암기하고 거기에 경험이 쌓여 서로 교호작용를 하는 가운데 어느 한순간 섬광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방대한 수학과 물리 지식을 바탕으로 도출된 것이지 그가 마냥 공상에 빠져있다가 어느날 천재적으로 떠올린 이론이 결코 아니다.

(4)위화감

평준화를 폐지할 경우 새로운 명문고와 「귀족학교」가 등장하고, 그 결과 학생들이 위화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 평준화 옹호론의 네번째이자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다. 이 주장은 우선 명문고의 존재가 과연 타기돼야 할 악(惡)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문명화된 자유세계, 그리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나 세칭 일류학교는 있다. 특히 사립학교들은 철저하게 다른 학교들과 차별화되는 명문을 지향한다. 우수한 학생들은 이 명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미국에서는 사립고등학교들이 엘리트 사관학교 역할을 한다. 우수 사립을 나온 우수 인재들이 명문대에 진학해 다수의 범재들을 이끌고 가는 것이 미국사회의 구조다. 일찌감치 공립학교의 교육붕괴 현상에 부닥쳤으면서도 미국이 세계의 리더 자리를 놓지 않는 것은 이런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는 공?사립 할 것 없이 지능과 적성과 특기가 제각각인 학생들이 아무 기준없이 뒤섞여 있다. 평준화의 원뜻은 모든 학생에게 질 좋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시설, 교사수, 과학기재 등 하드웨어와 교사의 질, 교육과정, 교수방법 등 소프트웨어를 지역별 학교별 격차 없이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전적인 평준화란 시설과 교사진의 좋은 학교를 기준으로 하고 이에 미흡한 학교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평준화는 입시제도의 병폐를 없애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그 결과  우수한 학교를 평범한 학교로 끌어내리는 평준화가 돼버렸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같은 어렵게 형성된 명문고를 강제로 없애버린 사실을 알면 세계 사람들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다. 헌법이 말하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는 능력의 고하에 따른 적절한 교육기회를 제공 받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똑똑한 아이는 더 똑똑한 아이가 되도록, 떨어지는 아이는 더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지금처럼 똑똑한 아이는 시시해서 하품하고 떨어지는 아이는 몰라서 잠을 자는 교육은 수백만 아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교육이다.

3. 결 론

이글은 평준화의 즉시 폐지나 단계적 보완 같은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준화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체적 방법론을 논하기 전에 그 문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일단 합의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 관점에서 평준화 논쟁의 4가지 주요 논점을 살펴본 결과 과외병, 과열입시, 주입식교육은 현실을 제대로 짚지 못했거나 평준화 관련 논점으로 삼기에 적절치 않은 것들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위화감이다. 위화감이야말로 현재 진행중인 평준화 찬반논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평준화 초창기와 현재의 평준화 찬반논란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위화감 문제를 주장하는 평준화 옹호론자들이 간과해서 안될 것이 있다. 평준화가 오히려 계층간의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고 있는 측면이다. 평준화 시행 이후 교실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학원과 과외로 달려갔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학교 공부가 시시해서,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학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과외비를 낼 여력이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학생이 갈라졌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출구가 막혀버렸다. 『옛날에는 못사는 집 아이들이 서울대를 많이 갔는데 요즘은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평준화 전에는 경제적으로 빈곤해도 학업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명문고에 입학해서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 수업을 받았으며, 별도의 과외를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명문대에 갈 수 있었다. 즉 열심히 공부만 잘하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다. 지금은 그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봉쇄돼있는 꼴이다.

평준화가 빈부격차의 심화를 불러오는 현상은 우리보다 한발 앞선 미국의 평준화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교육현장에서 일등과 꼴찌의 구분이 없어지자 학습 욕구가 사라진 공립학교 아이들의 학력은 빠르게 추락했다. 그나마 부유층은 사립학교, 사교육, 외국유학 등의 탈출구를 찾아 충실히 자식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과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속수무책, 대안이 없었다. 결국 부자들에게만 고급교육의 기회가 허용되는 교육의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95년1월 한국갤럽이 조사한 평준화 학부모 여론조사는 의미심장하다. 고교입시를 부활하자는 의견이 52%, 평준화 해제 반대의견이 44%로 엇비슷하게 나온 것은 짐작할 수 있는 결과였다. 중요한 것은 연령-소득-지역에 따른 다양한 입장 차이였다. 교육수준별로는 학력이 낮을수록, 직업별로는 블루 칼라 계층에 가까울수록, 지역별로는 농어촌이 많은 지역으로 갈수록, 생활비는 적을수록 상대적으로 경쟁입시를 더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상급학교 진학을 통해 신분상승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하는 계층일수록 완전경쟁의 입시정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사회 경제적 약자의 편을 자임하는 시민?교육단체들이 오히려 경쟁입시를 배척하고 평준화를 옹호하는 것은 아이러니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격차에서 비롯되는 위화감을 현실로 체험하며 살고 있다. 아파트 크기, 자동차 배기량, 월소득, 이자수입의 차이에서 매일 매일 위화감을 느끼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학교 배정만 제비뽑기로 해서 만들어내는 평등 아닌 평등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위화감 해소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평준화를 지지하는 많은 학부모들의 심리 밑바닥에 내 자식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못견뎌하는 일종의 「질투」가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억측일까? 이 모호한 개념을 고수하기 위해 학력저하, 교실붕괴, 사교육시장의 빈익빈 부익부, 막대한 재능의 낭비를 무릅써야 하는가? 그리하여 우리 사회와 국가의 경쟁력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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