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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의 ‘기본’ 몰라서 못했나 - 김진현
2002-07-04
히딩크의 ‘기본’ 몰라서 못했나 2002 한·일 월드컵은 끝나가고 있지만 2002년 6월 한국의 월드컵 열광과 환희의 정리는 만만찮은 과제로 남았다. 그 어느모로 보아도 정상은 아닌 비정상·이상적 현상으로서의 한국 월드컵 신드롬은 세 가지 현상의 복합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16강 염원이 뜻밖에도 8강을 넘고 4강으로까지 간 승리의 환희다. 특히 유럽 축구강국을 격파한 극적 플레이의 순간들이 열광의 폭발을 일으켰다. 둘째는 ‘붉은 악마’ 신드롬이다. 축구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축구광의 나라에서는 한 편의 응원단 색깔로 꽉 차는 경기장 모습이 있느냐고. 남미에도 유럽에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축구장을 온통 붉은색으로 독점하고 마치 상대가 있는 경기가 아니라 ‘붉은 악마’ 팀만이 있는 듯한 이상현상. 역사 이래 최초로 700만명의 인파를 거리와 광장으로 오게 만든 돌출적 응원문화의 등장,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일상의 흥얼거림으로 만든 폭발적 변화― 우리 스스로 한 달 전에도 예상치 못했던 신드롬이고 북한의 김정일도 놀랄 일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한말의 만민공동회의에서부터 3·1, 4·19, 6·10, 그리고 지난 25일까지의 집단시민의 거리와 광장 등장은 저항과 투쟁의 것이었는데 ‘붉은 악마’의 응원문화는 재미와 놀이의 집단행위였다. 거리의 700만명 놀이가 바람직스러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나쁜 변화는 아니다.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셋째는 히딩크 신드롬이다. 4강 신화의 창조자로 등장한 거스 히딩크는 확실히 총명하고 재능있고 지도자다운 축구감독이었다. 그리하여 ‘히딩크를 대통령으로’라는 말이 나오고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를 수입하자, 장관도 수입하자는 이야기가 책임자 입에서 나올 정도의 신드롬이 전개되고 있다. 2002년 6월 월드컵의 세 가지 신드롬은 승화시킬 가치가 있다. 열광, 집단, 개방 모두 심화하고 세련하고 승화시키면 우리 발전에 결정적 동력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남 앞에서만 ‘정상적’인 질서, 그리고 지나친 자신감과 콤플렉스, ‘국운결정론’을 여러 번 보고 들었다. 순리, 점진, 준비된 변화가 아니라 급작, 돌발, 예상 밖의 변화라는 우리 근대의 전개과정의 한 단락이다. 월드컵 신드롬의 심화, 세련, 승화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충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3년 5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일본에서 월드컵 유치를 제기했을 때 국내에선, 또 정부에선 얼마의 찬성이 있었고 조직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얼마나 방해가 컸는가. ‘붉은 악마’ 신드롬엔 포퓰리즘과 오락, 소비주의 오염도 섞여있다. 히딩크 신드롬이란 결국 축구의 원칙을 일관성있게 추진한 결과일 뿐이다. 기초체력 다지기, 실력대로의 선수선발, 그리고 풍부한 자금과 임기보장. 이 기본과 원리를 모르는 축구인, 이 기본과 원리를 모르는 기업인·정치인이 있는가. 우리는 세계를 안다. 기본과 원리를 안다. 밖에 나가면 세계무대에서 1등하는 기술자·기업인·학자·예술인·스포츠인도 많다. 문제는 타율적·가시적 목표가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실천하지 못하는 데 있다. 4700만 우리 모두가, 특히 지도자들이 기본과 원리에 충실하여 자기 직무를 수행하면 ‘기술자 히딩크’만으로 충분하며 ‘히딩크 신드롬’까지 갈 필요가 없다. 계량적 목표, 시간, 돈을 가시적으로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경부고속도로, 수출, 88서울올림픽, 93엑스포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비가시적, 비계량적, 우리 마음과 양심과 혼으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남의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모범은 바로 지도자들의 몫이다. 정치와 행정과 경영이라는 넓은 의미의 사회통합과 인간관계의 영역이다. 김진현 (칼럼니스트·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02. 6. 30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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