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는 ‘숨은 보호무역’ 개방 충격 최소화 카드로

원산지는 상품 국적을 의미한다. 소비자에게 정확한 상품 정보를 제공하고 유통 과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원산지 표시는 법으로 규정돼 있다.

원산지 표시의 역사는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초 선진 공업화를 이룩한 영국은 다른 나라 제품과 자국 제품을 구분하기 위해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했다. 1887년 영국 의회는 ‘상품표시법(Merchandise Marks Act)’을 제정했고, 왕실에 물품을 납품하는 대신 왕실 문장을 상품에 표시할 수 있는 특권을 허가받은 장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른바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 제도다. 상품표시법은 비영국산 제품을 영국산인 것처럼 속여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 판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실은 후발 공업국인 독일산 제품과의 차별화 일환으로 영국산임을 강조하려 도입됐다.

원산지 기준은 상품 국적을 결정하는 기준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농산물은 씨앗에서 수확까지 이뤄진 나라가 원산지가 된다. 수입 원자재를 사용하는 공산품은 부가가치, 세번 변경, 특정 공정 기준 등에서 한 가지 혹은 복수의 조합 기준을 사용하거나 여러 기준 중 하나를 충족시키면 되는 등 다양한 원산지 기준이 활용된다.

오늘날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논란이 많은 분야 중 하나가 상품별 원산지 기준이다. FTA 관세 혜택을 적용받는 기준이 바로 원산지 기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업 발전 단계가 높은 국가는 까다로운 기준을 주장하고 개도국은 완만한 형태를 주장한다. 아세안 국가들이 체결한 FTA 원산지 기준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 기준보다 덜 까다롭다. 원산지 기준이 까다로우면 FTA 시장 개방 충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무역정책 관점에서 까다로운 기준을 도입하기도 한다. 실제 많은 국가들이 관세 철폐를 하면서 원산지 기준을 까다롭게 설정해 FTA 협정이 발효되더라도 수입이 억제되는 효과를 노린다. 원산지 기준이 ‘숨겨진 보호무역주의(hidden protectionism)’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보호무역주의를 추진하는 미 트럼프 행정부는 FTA 원산지 기준을 강화시켜 외국산 상품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웠다. 현재 협상이 진행 중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미국은 북미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부품의 절반이 미국산이어야 하고, 역내 최소 부가가치 비율을 현행 62.5%에서 85%로 높일 것을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미국과의 무역수지 대부분을 자동차 분야에서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멕시코도 미국과의 무역수지 적자 대부분이 자동차 부문이다. 이에 멕시코와 캐나다는 미국 제안대로 원산지 기준이 설정될 경우 북미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붕괴될 것으로 우려하면서 미국 제안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로 인해 NAFTA 협상은 매우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우수한 부품을 조달하는 글로벌 공급 사슬(GSC) 구조의 대표적인 산업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볼보 등 세계적인 명차도 글로벌 공급 사슬 구조를 활용하면서 품질과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3월 타결된 한미 FTA 개정협상에서도 미국은 자동차에 대한 역내 부가가치기준 상향 조정을 주장했지만 다행히 최종 협상에서 현 기준을 유지하기로 결론이 났다. 미국의 상향 조정안이 협상용 카드였는지 모르지만 만약 NAFTA식의 원산지 기준이 채택됐다면 국내 완성차 업계는 물론이고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줬을 것이다. 향후 FTA 협상에서는 산업별로 합리적인 형태의 원산지 기준이 설정되도록 업계와 협상당국 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
출처-매경이코노미 2018. 5.8[경제칼럼]
<원문>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8&no=29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