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뉴스 저격'] 은행 장악하려 내려보냈던 금융 낙하산… 지금은 정권 보은인사

금융기관 고위 임원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별걸 다 꼬투리 잡는 감독 당국에 한참 시달리다 보니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받고 가야 하나'는 생각까지 들더라"는 것이다. 웃어넘기기 힘든 면이 있다. 우리 금융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금융사들이 글로벌 경쟁을 하는 시대에 관치(官治)와 낙하산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한국 경제 발전 과정에서 정부와 관료 집단은 큰 역할을 했다. 금융산업은 경제 발전 전략의 중요한 도구 내지 지원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은행 금리를 시장균형 수준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으로 유지한 저금리 전략이다. 정부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기업들을 키우기 위해 금융 비용을 낮추는 저금리 전략을 추진했다. 이러다 보니 은행은 경제정책의 도구가 되었다. 국책은행은 물론 민간은행까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은행장을 사실상 정부가 임명했고, 정부 고위직 인사와 은행장 인사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질 정도였다. 정부 입김으로 임명된 은행 고위직은 정부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금융산업 내에 민간 기관과 정부 간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단체도 속속 설립됐다. 이들은 정부의 요구를 금융기관에 전달하기도 하고, 금융기관의 요구나 업계에 유리한 정책 대안을 개발해 정부에 전달하는 등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분야별로 촘촘히 설립된 협회나 연합회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단체들이다. 이 단체들도 정부의 힘에 비례해 성장했다. 이러다 보니 금융업에 종사하는 금융'회사'들을 아직도 금융'기관'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금융기관 대부분이 주식회사로서 민간 주주 소유임에도 금융기관을 완전한 민간 회사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금융산업은 대표적 내수산업이고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인프라 산업이다. 또한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산업이다. 이러다 보니 금융 감독 조직을 통해 상시 감독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 반도체감독원이나 조선감독원은 없어도 금융감독원은 존재하고 힘이 막강하다.

2년여 전 우리나라 금융 경쟁력이 세계 80위권이라는 세계경제포럼의 발표가 있었다. 왜 이리 안 좋은 점수가 나왔나 봤더니 그 이유 중 하나가 평가에 국내 설문 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중소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우리 금융산업 내에서 '대출의 용이성' 항목을 평가하면서 나쁜 점수를 주는 바람에 순위가 대폭 밀렸다.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고객 만족도를 조사한 셈이었지만 이는 거꾸로 우리 국민이 금융기관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008년 금융 위기는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미국에서 월가 점령 시위가 벌어지는 등 금융산업에 대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규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실 미국의 금융 규제 강도는 우리 금융산업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지만 전 세계적 규제 강화 분위기 속에서 우리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강도도 덩달아 높아져 버렸다.

우리 경제개발의 역사적 배경, 산업의 특성 그리고 상시 규제 대상이라는 점 등을 종합해 보면 금융산업은 정부나 정치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정권만 바뀌면 CEO나 협회장들에 대한 논공행상적 보은 인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모든 자리가 이런 식으로 임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위 공무원 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CEO나 협회·단체장을 임명하는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낙하산 인사가 빈번해진 것이다.

고위 공무원 출신의 경험이나 실력을 감안하면 이들을 일률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인적 자원 낭비이고 공무원 출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관료 출신의 독식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도 상당히 문제가 있으므로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이제 일반은행의 경우 CEO 임명은 주주와 이사회의 고유 권한으로 돌려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흔히 재벌 체제를 비판하면서 오너 경영인이 주주의 이익을 무시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터널링'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민간 금융기관 인사에 개입함으로써 주주들이 원하는 최적격 인물이 임명되는 것을 막는다면 이는 다른 형태의 터널링 행위, 즉 정부의 이익을 반영하는 터널링일 수 있다.

최근 금융업을 둘러싼 환경이 어렵다. 그럴수록 전문 인력이 CEO로 임명돼 금융기관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문 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살리는 차원에서라도 최적격 인물을 주주와 이사회가 임명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낙하산이라는 부정적 단어가 이제는 사라지고 민관 협력이라는 단어가 금융산업 내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금융연구원장/바른사회운영위원)
출처 - 조선 2018. 1. 3[칼럼]
<원문>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2/20180102030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