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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흔들린 대선자금 수사 - 최병일
2004-03-09
초점 흔들린 대선자금 수사 열린우리당이 창당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기업들로부터 받았던 불법 자금 가운데 2억원을 당사 임차료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존 야당을 부패한 당이라고 몰아세우고 ‘깨끗한 정치’를 독점할 것 같던, 새로 탄생한 집권당 역시 검은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지난해 10월 검찰이 대선자금을 수사하기 시작하면서 정치권의 온갖 비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불법 대선자금을 추적하기 위해 시작됐던 검찰 수사는 2002년 대선후보 경선 과정까지 확대되면서 장기화되고 있다. 반년 가까이나 진행되는 검찰 수사는 문제의 초점인 정치인들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금품 수수의 다른 편에 서 있는 기업인들을 계속 압박해 왔다. 내로라 하는 모든 기업이 수사선상에 오르고, 핵심급 경영진 인사들이 출국금지를 당하며, 언제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기업 활동은 심각할 정도로 위축됐다. 전경련 총수는 취임 불과 몇 달 사이에 세 번씩이나 검찰총장을 찾아가 수사의 조기 종결을 요청했다. 총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검찰도 수사 장기화가 부담스러운지 정치인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는 총선까지 보류하겠다고 한다. 그런데도 기업인은 계속 수사하겠다고 하는 보도는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에 나선 것은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송짱’ ‘안짱’이 생겨났고, 모두가 이 드라마의 결말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불법 정치자금을 강탈해가는 정치권은 적당히 덮어두고 강압에 못 이겨 불법 자금을 제공한 약자인 기업인들은 계속해서 수사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 같다. 고강도의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여전히 불법 자금을 뿌리고 있다. 4·15총선 운동이 아직 법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선관위에는 벌써 수백 건의 불법 사례가 고발돼 있고 여당의 공천 후보가 금품살포 혐의로 사퇴하는 등 정치권은 ‘걸리면 하는 수 없고’라는 식으로 여전히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정치인들이 사법처리되는 와중에,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구태가 재연되고 있다. 애꿎은 기업들만 정부의 자의적인 규제 틀 속에 한국에서 기업을 해야 하는 준조세를 혹독하게 지불하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이 배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정치적 약자인 기업만 압박해 봐야 부정부패는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동안의 수사 정황을 통해 정치인들이 정권을 들먹이면서 기업인들을 협박하고 천문학적인 규모의 검은돈을 강탈해 가는 파렴치한 과정을 본 사람이면 누가 문제의 핵심이며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지 훤히 내다볼 수 있지 않은가. 오염 물질이 하수구로부터 계속 연못으로 흘러들어 연못이 썩어가는데 흙탕물 근처에서 헤엄치고 있는 송사리 몇 마리 건져낸들 그 연못이 깨끗해지겠는가? 정치권력이 경제 위에 군림하는 구조를 혁신하지 않는 어떤 해결책도 미봉책이고 땜질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 백만을 넘는 청년실업자와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기업가 정신마저 쇠퇴하고 투자 부진이 장기화된다면 세계 경제 호황이라는 호기를 놓치고 장기 침체 국면에 빠져들 가능성이 짙다. 경제가 침몰한 다음에 누가 다수당이 된다 한들 그게 그리 대수일까. ‘한국호’에 드리운 먹구름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다시 뛰고 싶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장기화된 대선자금 수사 정국이 어물쩍 문제를 덮는 식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리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기에 결말이 나야 한다. 정치권력을 빙자하여 민간 기업을 자신의 사금고처럼 여긴 정치인들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돼야 마땅하다. 기업인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서슬이 퍼런 정치권력 앞에 이들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본질을 잘 헤아려 마무리돼야 할 것이다. 검찰공화국의 태풍이 지나간 그 자리에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서야 한다. 얼짱 몇 명이 국회에 들어간다고,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고 정치가 더 투명하고 생산적으로 탈바꿈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이제 모두가 안다. 최병일 (이화여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4. 3. 9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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