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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난폭함’ 벗어나라 - 조희문
2004-02-25
한국영화 ‘난폭함’ 벗어나라 한국 영화의 도약은 월드컵대회에서 우리 축구가 4강에 진출한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중환자 같았던 ‘국산 영화’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문화의 주역으로 자리잡은 현실은 그 자체가 영화같은 이야기가 됐다. ‘쉬리’의 돌풍을 계기로 몰아치기 시작한 국민적 열광은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는 차례로 흥행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실미도’는 그 기록 위에다가 ‘1000만 관객 돌파’라는 새로운 신화를 얹었다. ‘쉬리’가 한국 영화의 생존력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면 ‘실미도’는 한국 영화가 넘어야 할 마지막 물리적 한계를 극복한 기념비적 성과를 만든 것이다. 뒤이어 나온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구분하는 일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이창동·김기덕 감독이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서 각각 같은 상을 받은 것은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 영화가 국내외에서 이만한 평가를 받은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참으로 궁핍하고 메말랐다. 해방 이전은 일제의 통제와 압박에 시달렸고, 6·25전쟁 이후에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견뎌야 했다. 자본은 부족했고 기술은 빈약했으며 솜씨는 어설펐다. 1960년대가 황금기였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외국 영화들과는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좁은 뒷골목을 서성거리는 좌판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불안한 정치 권력은 선전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고, 한국 영화의 위상은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험난한 세월을 지킨 것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영화인들의 열정과 집념뿐이었다. 필사적인 생존의 본능만이 그들을 움직이는 에너지였다. ‘장군의 아들’이나 ‘서편제’ ‘투캅스’ ‘결혼이야기’같은 영화들은 지쳐 쓰러지려는 한국 영화를 지탱해준 약수나 다름없었다. 영화인들은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여겨 헤아리며 그 답을 찾아내려 애썼다. 1990년대 후반은 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기력을 모으는 과정이었고 ‘쉬리’는 한국 영화 역사를 가르는 분기점을 만들었다. 불길은 타오를수록 더 뜨겁다. 영화인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관객은 한국 영화를 신뢰한다. 화려한 설비의 극장은 흡족한 문화공간이자 놀이터가 됐다. 불붙은 한국 영화 열풍이 쉬 사그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 열풍을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이다. 20세 전후에 몰려 있는 관객의 범위를 넓히고, 국내 시장의 한계를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일은 새로운 과제다. 그 전제로서 필요한 부분은 최근 한국 영화의 힘이자 약점이기도 한 난폭한 열정을 속 깊은 진지함으로 바꾸는 것이다. 흥행을 이끈 영화들은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간에 거친 욕설과 폭력, 성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실미도’나 ‘태극기…’는 인상적인 구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과도한 폭력, 이념적 긴장 같은 요소들로 인해 청소년층 이하가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다른 문화권에서 제한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다. ‘친구’의 폭력은 교본으로 삼을 정도이고 ‘공공의 적’에서는 부모 살해, 정당한 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찰의 자의적인 폭력이 당연한 듯 등장한다. ‘해피엔드’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같은 경우는 가족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과도한 일탈을 소재로 다룬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까지도 드러낸다. 흥행을 이끄는 주류 영화들이 보여주는 난폭한 열정과 자극은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드는 원천이지만 동시에 유통의 범위를 스스로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해외 판매나 방송에 내보내는 경우 별도의 편집본을 만들어야 할 정도라는 것은 이들 영화의 표현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입증한다. 난폭한 열정과 자극은 일시적으로 관객을 부를 수는 있지만 올가미처럼 한국 영화를 옥죌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을 이끌어낸 영화인들이라면 스스로 안정을 찾는 일도 해낼 것이라 믿는다. 그만큼 한국 영화는 성장했다. 조희문 (상명대 영화평론가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2. 25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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