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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성공의 빛과 그늘 - 조희문
	2004-01-13
‘실미도’ 성공의 빛과 그늘 영화와 정치는 관객(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얼마만큼 진실(진심)인지를 추구하기보다는 얼마나 그럴 듯하게 보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1971년 8월 23일, 무장한 일단의 특수부대원들이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의 청와대로 향하다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대치하던 끝에 자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오후 3시15분 대간첩대책본부는 “서울 침투를 시도한 무장공비 21명을 군경이 저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오후 6시35분, 국방부장관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 관리 아래 수용중이던 특수범 23명이 고도(孤島) 격리 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한 것”이라고 다시 발표했다. 불과 몇 시간만에 사건 주동자들의 정체가 ‘서울 침투를 시도한 무장공비 21명’에서 ‘실미도에 수용중이던 특수범 23명’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그들이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가 아니며 군 당국의 관리 아래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지만 누구도 그들이 ‘군인’이었으며 비밀스럽게 훈련한 특수부대원이었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정부 발표가 거짓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은 침묵 속에 숨긴 것이다. 그 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는 ‘32년을 숨겨온 진실―이제는 말한다’는 문구를 내세우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가공되거나 영웅화하며, 사건은 보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할 만큼 탈색하거나 덧칠한 것이다. 당시 정부 발표가 진실의 일부만을 드러낸 것이었다면 영화는 ‘진실인 것처럼 포장한 픽션’ 수준이다. 어느 쪽도 ‘실미도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당시 정부 발표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다시 영화를 보며 비로소 진실의 내막을 알게 됐다고 믿지나 않을까. 그 영화 ‘실미도’는 또 한번 한국영화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예매 숫자, 개봉 이후의 흥행 속도 등을 감안하면 한국 영화사상 최고기록을 세운 ‘친구’의 성과를 넘을 것으로 기대할 정도다. ‘친구’는 관람 등급이 ‘18세 관람가’였고,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흥행 최고 기록을 세우고도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던 것에 비해 ‘실미도’는 ‘15세 관람가’이며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1000만 관객’의 대기록을 세우는 첫 번째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는 데서 생기는 강렬한 사실감, 배우들의 개성있는 연기, 힘 있는 연출, 풍성한 스펙터클, 죽음으로 최후를 맞는 비장감, 폭력적인 권력에 포위당한 개인의 무력함 같은 요소들을 버무려 냄으로써 품격과 감동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사실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느냐 하는 점에 승부를 거는 연출이 만든 결과다. 당시의 긴박했던 정치 상황, ‘실미도 부대’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역사학자나 관심 있는 전문가들의 몫이지 영화 제작자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인식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실미도’는 대단한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강우석은 이미 제작과 배급, 유통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대작을 연출할 수 있는 흥행 감독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거물 흥행사의 반열에 스스로를 올려 놓았다. 영화계로서는 잇따른 대작 영화의 흥행 실패에 따라 투자를 주저하던 자본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며 해외 영화계에서도 한국 영화의 약진에 더욱 주목함으로써 시장 확보에 새로운 전기가 생길 수도 있다. 한국 영화의 산업적 에너지를 더욱 키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투자가 오락성 대작으로 몰리고, 큰 영화가 문어발처럼 배급망을 장악하며, 영화계의 흐름이 소수 몇 명에 의해 좌지우지(左之右之)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 외형적 발전이 오히려 내부의 편중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감동이 부른다면 최면에 걸리듯 특정한 대상에 열광하는 우리의 ‘우르르 증상’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모습이다. 영화 ‘실미도’ 선풍이 반가우면서도 불안한 이유다. 조희문 (상명대 교수 / 영화평론가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1. 1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