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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국회, 한 일이 뭔가 - 박효종
2003-12-31
2003년 국회, 한 일이 뭔가 한 해가 저무는 가운데 국회가 밀린 숙제를 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허구한날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막판에 일을 챙기려드니, 기나긴 방학동안 내내 놀다가 개학 전날에야 비로소 숙제를 챙기는 게으른 학생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명색이 국민들로부터 입법권을 위임받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회라면 게으름뱅이 학생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국회는 특히 금년 후반기부터 돌출한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인해 여야간 사활을 건 정치싸움에 휘말린 나머지 국정을 보살피고 민생을 챙기는 데 소홀하기 짝이 없었다. 말로는 ‘민생국회’ 혹은 ‘일하는 국회상’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실상은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 한·칠레간 자유무역협정(FTA)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성심 성의를 다해 농민들을 설득하고 협정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보다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느라고 늦어졌고 급기야 격렬한 대규모 농민 시위 속에 비준안을 처리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비준안이 처리되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의와 위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비준안 처리 지연과 더불어 예산안도 통과되지 못했다. 사실 예산안 통과보다 중요한 것은 예산안에 대한 심의가 꼼꼼하게 이뤄졌는가하는 점이 문제다. 그 동안 예산 심의에 집중한 시간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내년 총선을 위한 선심성 예산에 여야간 담합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으면 예산을 다루는 국회 모습도 변해야 하는 것인데, 성실한 예산 국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기 짝이 없다. 뭐니뭐니 해도 국회가 입이 열 개라도 입법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강변할 수 없는 부분은 선거법 개정에 관한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인해 대통령부터 나서서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하는 등, “누가 더 시커먼가” 하는 ‘시커멍스’들의 정치싸움으로 나라 전체가 휘둘린 것을 생각하면, 선거법 개정 문제에서 만장일치의 합의가 도출돼야 했었는데, 막판에 와서까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이제 헌법재판소가 정한 시한을 지키지 못해 16대 국회가 위헌이 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그렇다면 다툼의 명분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선거구 문제, 즉 지역 의원 수를 늘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여서 일반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이 문제를 가지고 몸싸움까지 벌이는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여야의 다툼을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선거법 개정에 임하는 태도가 정치권의 당리당략과 ‘내 밥그릇 챙기기’ 싸움이라는 점 외에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여야는 투명한 선거법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도 아니다. 후원금 영수증의 선관위 제출을 의무화하는 문제나 당원 행사에서 식사나 교통 편의 제공을 금지하는 문제, 축의금·조위금 금지 문제 등에서 역시 개혁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했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버리고 정치 신인들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흔적도 없다. 이 시점에서 국회의 임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국회는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감시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헌법 기관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앞장서서 국정과 민생을 챙기고 개혁을 외치기보다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시민단체들의 개혁적 요구나 여론의 질타에 마지 못해 끌려가는 식이다. 그 결과 항상 뒷북을 치고 늑장 대응하는 ‘지각 국회’가 되고 말았다. 우리 국회는 국회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는 평범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사실 범정치개혁협의회에서는 국회의원 정수를 299명으로 늘리자고 제안한 바 있다. 상원이 없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299명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한사코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데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에는 국회가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다고 국회의원 수를 늘리겠다는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냉소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국회는 이러한 여론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여 국민들로부터 이제 일은 많고 국회의원은 적으니, 국회의원 수를 늘리자는 말이 먼저 나오게끔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12. 30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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