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평가가 인간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 신일철 | ||
2003-12-10 | ||
신용평가가 인간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공돈'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미국의 신용교육 근래 우리사회에 '교육이민'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의 교육열은 용광로 같으나 그 '교육'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견(正見)이 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몇 해 전 미국에 이민간 친척집에서 어느 새벽에 '교육'이 무엇인지를 내 눈으로 보고 깨우칠 수 있었던 광경을 접했습니다. 그날따라 새벽부터 비가 내렸고 그 빗속에서 아들의 신문배달을 차를 가지고 돕는 미국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중류이상의 부유한 편인데 아들을 사람 만든다고 기어코 신문배달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역시 미국의 독립정신은 자식을 자조자립하는 독립적 인간으로 키우는데도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한국 부모들의 자녀교육열도 대단해서 전 미국학교의 최고 우등생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한국서 이민간 여학생의 시험성적이 최우수여서 하바드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여학생이 낙방되었습니다. 분을 참을 길 없는 어머니는 혹시 인종차별이 아닌가해서 그 대학 입학관리처에 찾아갔습니다. 그 대학 입학처에서는 친절하게 그 사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귀댁의 딸은 성적은 최우수이다. 그런데 면접에서 그 학생은 앞으로 사회사업가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면접관은 그동안 몇 번이나 헌혈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여학생은 단 한번도 헌혈한 바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불합격의 사유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합격의 충분한 이유설명이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역시 미국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헌혈 등 사회봉사과외가 번성하겠다고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농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늦게나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나 지식은 반듯이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인의 생활철학입니다. 필자가 읽었던 미국정신에 관한 책에는 유식하게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미국인의 특성은 "가시적 업적성과와 계량적 측정에 대한 강조"(visible accomplishment and stress an measurement)입니다. 우리 한국사람이 미국인과 상담을 할 때 아무리 미사여구로 구변이 좋아도 잘 안 통합니다. 저쪽에서는 "당신네 기업의 가시적 성취와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계량적 실적을 알고 싶다"는 신용평가의 프래그머틱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벤재민 프랭클린은 '신용'의 덕을 강조하는데 고상한 관념적 표현을 피하고 "제때에 빌린 돈을 갚는 사람은 만인의 돈지갑의 주인이다"란 금언을 전파했습니다. "신용에 영향을 주는 행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자유시장 사회의 규범입니다. 우리는 외환금융위기에 대해 한국의 국제신인도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 대처하는 처방도 프랭클린은 이미 1750년대에 내놓았다고 생각됩니다. "채무자가 너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를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듣는다면 그가 앞으로 6개월 만기를 유예해주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러시아의 레닌은 "앞으로 새 세상에는 은행도 금도 필요가 없어지고 황금은 화장실에나 바르게 될 것이다"라고 선동했습니다. 당장은 대중의 갈채를 받았으나 레닌주의적 시장폐지, 금융신용기관 폐지의 선동은 금융시용의 규범부재로 인해 구소련을 20세기의 야만으로 종말을 고하게 했습니다. 신용의 덕과 신용창조가 다시 신세기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만의 전유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금융신용제도는 무자본의 '신용'으로 기업을 할 수 있는 점에서 '신용주의' 제도임을 우리 젊은 세대에게 몸으로 체득하게 하는데 우리는 너무 게을렀습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신용조직속의 'cash value'의 진리관 우리나라 학교교과서에 신용의 덕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가정교육, 사회교육에서처럼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생활화하는 '신용'이 바로 자본임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진보운동권은 뭐든지 '자본의 논리'를 내세우나 '신용의 윤리'를 말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역시 미국의 철학자 W. 제임스는 "진리란 현금가치(cash value)이다"라고 주장했지요. 우리는 진리는 사실과 합치되는 진리대응설(對應說)이나 영구불변의 전대적 보편적 진리관에 길들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 미국에서도 화폐를 찍을 때에는 반드시 같은 값어치의 금이 중앙은행에 보유되어 있어야 하는 '현실적 가치'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전쟁후 산업의 융성으로 신용창조가 불가피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화폐는 금보유가 없어도 '신용조직 안에서 잘 통용되면' 그 '캐시 벨류'(cash value)를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한국화폐 1만원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만 종이 조각이고 유통되는 동안 더럽혀져서 감기로 콧물날 때 쓰기에도 쓸모가 없는 종이 조각입니다. 그러나 그 만원권으로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그 값에 상당한 물건을 사는데 거절당하지 않고 통용되면 그 종이가 어느덧 '현금가치'를 가진 것이 됩니다. 어떻게 그 종이조각이 만원어치의 현금가치를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신용'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기 속과 같이 신용사회 속에 살고 있고 일지만, 신용타락이 되면 공기가 없어 숨을 쉴 수가 없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외환금융위기에서 신용카드의 사회윤리타락 우리 한국의 외환금융위기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일시에 국제적 신용타락으로 우리나라 국부(國富)의 절반이 사라진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에 대처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더 심각한 신용타락의 시민윤리적 위기를 남겨놓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용카드의 350만 신용불량자의 양산입니다. 신용카드의 생명은 신용입니다. 그런데 신용카드의 남발로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 고용문제에 대한 눈가리고 아웅식의 대응을 한 실책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용카드사도 투기적 보험적 심성으로 리스크관리에 게을렀던 불찰이 자유시장의 정도가 무엇인가를 따끔하게 교훈받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신용카드에 의한 신용불량 추정자를 400만명으로 잡는다면 그중에는 천만원이 아니라 1억까지의 빚쟁이도 나와 신용카드형 자살자, 신용카드형 청소년범죄도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용창조가 곧 신용파괴가 된 느낌이 듭니다. 한때 신용카드 산업의 폭주를 보면서 이제는 누구나 은행의 담보같은 것 없이 돈을 빼 쓸 수 있는 '금융낙원'이 되었다는 착각까지 일으켰습니다. 그 착각은 마치 빚독촉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공돈같이 어디서나 누구나 돈을 뽑을 수 있는 도깨비 금방망이같이 변형된 것으로 한국신용카드의 허점이 생겼던 것입니다. 한시적으로는 신용카드가 당장의 생계위협을 받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숨통을 터준 임시변통의 효과가 있었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패자부활의 기회를 주어 손쉬운 융자혜택을 준 일면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외환위기로 생계가 막막해진 일부 선의의 신용불량자들에 국한된 관점에서는 내수진작의 편법으로 응급의 위기회피 처방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 400만명의 문제는 다만 개인생계에 대한 '워크아웃' 제도나 그 빚을 탕감해주는데서 생기는 '모럴 해러드' 등의 피상적 문제파악이나 대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도소의 수감자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는데 신용불량자 '특사'는 왜 없느냐가 되면 신용의 덕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빚에 시달리다보면 온 세상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과연 이 신용카드 불량자 문제가 복지정책이나 사회적인 저소득층 사회보장 등의 '사회적 안전망'의 문제인가 라는 점입니다. 신용카드 산업이 넋 빠진 듯이 과당경쟁으로 카드세일의 남발을 한데 대해 자기책임을 면제당할 수 있느냐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빚독촉에 몰리면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며 심한 경우에는 평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큰 멍에를 지게 됩니다. 빚에 시달리던 어떤 친구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는 인생을 체념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새는 석달 열흘 비가 내려서 낮은데도 한길 높은데 한길 되었으면 시원하겠어"의 넋두리는 모두가 같이 타이타닉호처럼 동반 익사했으면 좋겠다는 푸념이었습니다. 이런 궁지에 몰리거나 자력구제가 불가능할 때 절망 속에서 천지개벽 같은 변혁이나 구세주의 출현을 대망하게 되겠지요. 신문에 평생 모은 거액을 기부한 독지가가 이런 신용 불량자의 구제요구에 시달리다가 은신했다는 뉴스도 보았습니다. 그런 독지가들의 '돈'은 사용을 지키기 힘쓴 신용창조의 결정체입니다. 1930년대 패전으로 무거운 전쟁배상으로 국가파산 상태에 빠진 독일에 사이비구세주로 히틀러의 나치즘이 나타났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베트벤 같은 악성(樂聖)을 배출한 독일국민이었으나 곤궁해진 대중은 나치스의 포퓰리즘 운동에 휘말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에서의 도피'인지 게르만민족의 위대한 갱생인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히틀러 등 선동정치꾼의 손에 정권을 넘겼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탈냉전의 21세기에 들어서며 뒤늦게 보수`진보의 보혁논쟁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정당이나 여론에서 보수`진보의 구획은 대단히 불투명합니다. 그 불가사의의 분위기가 어느덧 진보=친북, 보수=반북의 단순 2분법으로 보이기도 하고 붉은 머리띠를 맨 강성노조는 진보, 기업은 보수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빚에 시달리는 사람의 다급한 심성에서는 그런 좌익, 우익의 이데올로기에 앞서서 어떤 구세주가 나타나 신용불량의 짐을 덜어주기를 고대하다가 "바꿔, 바꿔" 편에 들게 될 것입니다. 1940년에 하이예크는 1917년의 레닌의 러시아혁명이나 독일의 나치스가 모두 "예종에의 길"이었다고 깨우쳤습니다. 분명한 진보`보수의 정책논쟁은 오히려 바람직하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확 바꿔져서 내빚이 크게 탐감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진보'가 아닙니다. 니체는 시민사회에서 생긴 대중적 포퓰리즘의 대두를 보고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대중 속에 이미 '르쌍치망'(반감)의 대중적 평준화 정서가 자리잡고 이 '르쌍치망'을 선동`조직화하는 어두운 힘의 무서움을 예감했습니다. 모두가 신용사회에서 떳떳하게 '주인의 도덕'으로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노예도덕'이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지도층마저 '노블레스 오브리제'의 시민윤리마저 없어지면 '법의 지배'의 사회 기강마저 흔들게 됩니다. 신용불량자에게는 "법대로 한다"는 법치의 소리에 오히려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선거에서 그런 정당에는 등을 돌리게 됩니다. 법치가 아니라 온정주의적 구세주를 대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치는 보수요, 온정주의는 '진보'입니다. 문제는 민주선거에서 나치스가 그런 '르쌍치망'을 선동해서 집권한 전례가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알젠틴병'에서처럼 좌우 양파가 모두 오히려 우파가 더욱 온정주의 적시혜 경쟁에서 득표에 전념했답니다. 이런 악순환에 말려들면 사실 보수`혁신의 색깔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정치`행정과 인재선택에서 애머추어리즘이 쉽사리 '프로'를 억제하여 마침내 돌파리 정치가 된데서 알젠티나의 국가부도를 결과한 것입니다.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의 신용평가없이 강성노조와 포퓰리즘에 밀려 마침내 정치 애머추어의 종착역까지 이르게 한 것이 다름 아닌 '영국병'이오 '알젠틴병'입니다. 이제 '한국병'의 진단은 신용창조냐 신용날조냐의 문제로 집약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 시민의식 속에서 인물과 기업정책의 새로운 잣대로 신용평가의 기준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학력도 신용평가의 일부입니다. 학벌파괴를 하는 것은 좋으나 학력까지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도 신용있는 사람은 성공하고 신용이 타락되면 패가망신한다는 규범을 세워 '고신뢰사회'의 지향에서 일탈되지 않는 신용불량자 구제의 현책이 강구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도 신용카드에서 돈을 뺄 때 신기하게 공돈 생긴 것 같은 착각을 가집니다.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서 카드로 지불할때에도 카드는 다시 챙기지만 그것이 '신용'의 담보임을 번번이 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찌도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생각이 달라지는 것과 그렇게 흡사한지요. 담배곽에는 흡연의 폐해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신용카드마다 신용불량의 기준과 경고가 나붙어 신용카드 문화의 정착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돈은 공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같은 신용이다"라고. 신일철 (고려대 철학과 명예교수 / 시민회의 고문) 출처 - 자유기업원 Opinion Leaders` Digest 2003. 12. 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