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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지칭하는 이른바 ‘코피노(Kopino)’ 문제가 국내 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필리핀에 가 있던 한국인과 현지인 간에 태어난 형제가 서울가정법원에 낸 인지청구소송에서 법원은 유전자 감정 결과 등을 근거로 혈연적 부자관계가 존재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연간 2000만 명의 한국인이 해외로 나가고, 그중 100만 명 내외가 필리핀을 찾는다고 한다. 여행을 위해, 또는 사업차 해외를 방문하는 한국인의 수가 많아지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이 빈번하고, 그로 인한 문제가 국제적 파문이 이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중 가장 불미스러운 일이 코피노 문제다. 과실로 인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의 문제나 가치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법의 문제이기도 해서 국민의 준법 수준을 가늠하는 가장 원초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최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3만 명의 코피노가 필리핀에서 사각지대에 있다고 보도했다. 사안의 성격상 공식적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코피노의 수가 3만 명에 이른다는 외국 언론의 보도는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을 부정적으로 바꾸는 동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류(韓流)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휴대전화나 자동차 같은 세계 일류 상품이 한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지만, 코피노 문제는 한국을 쳐다보는 시각을 일순간에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어떤 경우든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욱 오래 뇌리에 남아 있음은 인간 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국격의 하락과 같은 대승적 문제 외에도, 잘못임을 알면서도 이를 고치지 않는 개인의 태도가 먼저 지적되고 시정돼야 한다. 혼외자식을 낳는 일은 과거 비문명사회에서도 지탄받는 일이었는데, 문명화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일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도 일단 발생하면 그에 대한 사후적 보호가 뒤따르게 하는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코피노 문제 발생은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겠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친자관계가 확인된 이상 이에 대한 법적 보장과 보호가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서울가정법원의 판결은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법의 판단 이전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가치 판단과 도덕적 근신이 필요한 것이지만, 이미 발생한 사안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자세로 이를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문제를 야기한 개인의 책임으로 보기에는 아픔이 너무 크고 많다. 이런 일이 국가와 사회를 해치게 되는 건 순식간임은 역사적 경험에서 익히 보아 왔다. 개인의 문제라 할지라도 사회 문제로 바뀌게 되면 국가와 사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서울가정법원의 결정은 코피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동안 일부 시민단체나 법무법인이 사실상의 노력을 통해 코피노의 친부를 찾아주고 양육비를 받아준 사례는 있었지만, 법원의 판결로 결정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사회적 문제는 사회적 관심이 가장 적절한 처방이다. 더 이상 불행한 코피노가 태어나지 않도록 개인적·사회적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문제는 이를 슬기롭게 풀어가려는 사회적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친자 여부를 가리는 인지소송을 제출한 이유가 ‘아버지를 찾아주고 한국에서 키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말 속에 해법이 들어 있다.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14. 6. 25 포럼
<원문>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62501073937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