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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私淑)이란 말을 아실 것이다. 스승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감히 스승을 집으로 불러들여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와 빈자(貧者)가 공통으로 취하는 공부법인 동시에 성적 불량으로 선생이 계신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경우에 활용되기도 한다. 나이 들어 운이 좋아 사숙한 선생님들을 직접 뵙게 될 때만큼 기쁜 일이 또 없다. 안구와 지면의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이 현생에서 이어졌으니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최근에 뵌 선생님이 두 분이다. 유종호 선생과 김화영 선생. 유종호 선생은 나이가 많지 않으셨을 때도 머리가 하얗게 세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참 멋지다. 백발은 지혜의 상징이라고 시작하는 경구가 있다면 딱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선생의 책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소생의 시야를 틔워 준 그야말로 보물섬 지도 같은 책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마구잡이로 의역된 번역 시를 선호하고 그것을 모형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실패한 시인으로 성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의 하나가 될 것이다'는 경구다. 덕분에 외국 번역 시를 독서 범위에서 화끈하게 제해 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영어 실력이 좋아 원문을 찾아 읽은 것도 아니어서 그 방면은 영원히 미개척 영역으로 남기는 했지만. '저항하지 않는 시인은 모두 단죄되어야 하며 저항한 시인은 모두 칭송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저항의 시인도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시인의 직업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문장도 좋았다. 그게 없었다면 1980년대 숙성 미달의 민중시와 결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화영 선생은 '프랑스 문학 산책'으로 불문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손을 잡아 주신 분이다. 한번은 TV에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중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태연히 이렇게 대꾸하셨다. "허영심 때문이죠." 댕~댕~댕~.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던 것 같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골 비고 허황된 대답만 늘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참 고맙고 소중한 분들이다(선생님 사랑해요, 잉잉).
갈래는 다르지만 역시 방향 못 잡고 헤매던 미욱한 머리를 깨우쳐 주신 분이 복거일 선생이다. 문화, 예술에서 정치, 경제,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풍만하신 분이어서 사숙이 벅찰 지경이었다. 처음 강연을 들었던 때 어찌 생기신 분인가 궁금해 갔다가 막상 선생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귀한 말씀이 내리쏟아지는 바람에 받아 적느라 바빠서.
병환으로 자주 뵙지 못해 아쉽던 차에 이달 24일 정규재TV라는 방송에서 오프라인 미팅을 가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병세를 묻고 공허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피붙이를 암으로 잃어 본 사람은 다 안다. 그보다 해야 할 것은 건강하실 때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기는 일이다. 선생을 좋아하는 분이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 자리 이름이 '봄밤'이라고 했다. 봄도 아름답고 밤도 아름답고 문학도 아름답고 선생도 아름다울 것이다. 훗날 인명사전에 선생에 대한 설명을 달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첫 줄을 이렇게 쓰고 싶다. '복거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사상가. (복)거일이라 쓰고 거인이라 읽는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14. 5. 10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원문>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09/20140509025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