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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법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법을 무시하거나 요령 좋은 사람들이 더 잘된다는 믿음이 퍼져 있다. 이런 사회병리 현상 뒤에는 잘못된 법 집행 풍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 때 그 제도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제대로 집행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명분과 당위만으로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많은 법ㆍ제도들이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사례가 발생한다. 특히 안전, 환경, 위생, 건축 관련 분야에 이런 규제가 많다.
이런 규제들은 대부분 규제를 받는 사람이나 집행하는 사람이나 법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장에서 집행이 절충되거나 보류된다. 이 과정에서 뇌물과 봐주기가 오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규제가 도입된 공익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채 사실상 무규제 상태를 초래한다. 그래서 대형사고가 반복되는 것이다. 규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규제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규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다. 안 지켜지는 규제는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법을 지키는 정직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손해를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갓길 불법 추월을 하는 차들을 보면서 정직한 운전자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생활경험을 통해 역시 갓길 추월한 운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더 빨리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법을 준수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손해를 봐야 하는 현실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우리나라 모든 분야에서 이런 새치기와 불법ㆍ탈법 현상이 만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도 우리 사회의 그런 병리 현상 중 한 부분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선박 안전 규제가 없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규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다.
이미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듯이 그 많은 해상 안전 규제나 감독 기능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이번 세월호 사고 후에도 마치 규제가 없어서 사고가 났다는 듯이 많은 규제가 신설 또는 강화될 것이다. 이미 국회에 선박 안전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이 여러 개 제출되었다. 그러나 울분과 감정으로 제도를 만들 수는 없다. 이번 사고도 그렇지만 이미 존재하는 규제조차 안 지켜지는 상황에서 더 엄하고 강한 규제를 무더기로 도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이미 있는 규제를 어떻게 제대로 집행할 수 있을지, 새로 도입되는 규제들이 제대로 집행될 것인지부터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법ㆍ제도를 만들고 이를 제대로 집행해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책임은 바로 그 제도를 만드는 입법권자와 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게 있다. 규제가 안 지켜지는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 규제를 만드는 입법권자와 그런 규제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공무원들에게 있는 것이다.
지키지 않는 규제를 만들어 놓고 사고가 난 후 국민의 낮은 준법정신과 의식을 탓하는 것은 직무유기일 뿐이다.
준수율이 낮은 규제를 가지고 있는 정부 부처에 일정 기간 내에 준수율을 일정 수준으로 높이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한다. 규제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만들었으면 제대로 집행해서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공무원의 책임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지키기 어려운 규제를 잔뜩 만들어 놓고 제대로 집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법을 안 지키는 국민 탓만 하는 공무원들의 규제 만능주의와 관료주의를 혁파해야 한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대학장 / 바른사회 공동대표)
출처 - 매일경제 2014. 4. 29 테마진단
<원문>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4&no=669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