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 > 바른사회 칼럼
> 자료 > 바른사회 칼럼
머리를 박박 민 푸른 눈의 구도자가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그중 대표 한 분 꼽으라면 현각 스님이다. 일단 학력에서 한번 세게 '먹어'준다. 프린스턴이나 예일도 좋다는 말 많이 하지만 아직도 한국 정서에는 '하버드'다. 이분 책 제목이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다. 묘한 울림을 주며 슬슬 감동의 전주곡이 흘러나온다. '프린스턴에서 화계사까지'가 주지 못하는 감동(이 원리는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나는 런던의 택시 운전사'로 바꿔놓았을 때 주체가 사색하는 망명자에서 고단한 이주 노동자로 급격히 질이 떨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현각 스님의 유년 시절로 가보자. 본명은 폴 뮌젠, 천재 소리를 들으며 정말 천재의 길을 걸었다. 예일 대학교에서는 철학을,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에서는 비교종교학 석사를 했다. 현각의 갈증은 진리였다. 항상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화두로 달고 살았다. 현각의 갈증에 시원한 생명수를 던진 사람이 숭산 스님이다. 우연히 하버드에서 숭산 스님의 강의를 듣고 폴 뮌젠은 몇날 며칠의 고민 끝에 출가를 감행한다. 예수의 말씀을 사모한 끝에 진리를 찾아 스님이 되었다는 이 기막힌 역설. 인생은 이래서 부조리하고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계획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일백 년 동안 일찌감치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그걸 달성한 사람은 김영삼 한 사람밖에 없다(학창 시절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정주영은 지금의 현대 자동차를 꿈꾸지 않았다. 이건희는 현재의 삼성전자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터넷이란 게 등장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같은 설정이 가능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시간이 지나다 보니 주변의 상황이 변하고 변한 끝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어떤 목표나 계획을 세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5·16 군사혁명 직후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미국에 보여줬다. 미국 관료들은 '거지들의 쇼핑 리스트'라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 경제개발 계획서를 본 적은 없지만 요약하자면 아마 이거였을 것이다. '잘살고 싶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그렇게 막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무작정 달렸다.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희망보다 중요한 게 욕망이다. 희망은 상처받기 쉬우며 그래서 가끔은 절망보다 더 나쁘다. 욕망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남이 훼손할 수 없다.
해서 계획보다 중요한 건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거다. 가진 정보를 총동원해 길이 보이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거다. 그리고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사다리 타기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꼬임과 반전이다. 막혔는가. 그럼 또 다른 길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의 책 제목인데 들어 본 말 중 나쁘지 않은 조언이다. 조금 바꿔보자면 '인생은 문제 발생의 연속이다'가 되겠다.
가끔 면담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있다. 일종의 인생 상담인데 이때 중요한 건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한마디 하기는 한다. 나는 아직 인생 상담을 해 줄 나이가 되지 않았고 너는 아직 인생 상담을 받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인생에 상담 같은 게 왜 필요하니. 그냥 사는 거지.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하면서.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14. 3. 15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원문>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14/20140314028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