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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關稅化 유예 동결' 주장은 이자 냈다고 원금 안 갚는 격
'내년 개방'은 국제법적 의무, 이행 안 하면 통상압력 불가피
국익과 국가 신뢰도에 타격 커… 주도권 쥐고 관세率 책정해야
모든 수입농산물에 관세를 매기고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 WTO의 원칙이다. 한국의 쌀은 예외로 인정받아 20년간 시장 개방 유예의 혜택을 받았다. 이 기간에 쌀 수출국들도 최소한의 시장 접근은 보장받아야 하므로 한국이 5%의 관세만 부과하고 수입해야 하는 의무수입량(MMA)은 연간 40만t으로 늘었다. 이제 유예기간이 2014년 말로 종료되는데도 정부는 쌀 관세화 시행 여부를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쌀 시장 개방 반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한국 정부가 MMA를 늘려주어 쌀 수출국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지금 DDA에서 다른 WTO 회원국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과 같이 현상 유지 권리를 행사하며 쌀 관세화가 유예되고 있는 상황을 동결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MMA를 늘려준 것은 한국 쌀에 대해 20년간 시장 개방을 미룰 수 있게 해준 데 따른 수출국들의 기간 손실을 보상한 차원이다. 이제 유예기간이 소진되어 관세화해야 하는데 이걸 다시 미루면서 과거에 준 MMA 보상 이야기를 꺼내자는 말인가? 마치 돈을 빌려서 쓴 다음에 그동안 이자를 지불했으니 원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WTO 회원국들이 '현상 동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UR 이후 전개된 DDA 협상에서 잠정 합의한 사항들을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기 위함이다. 한국이 쌀시장을 2015년부터 개방해야 하는 것은 UR 협상의 결과 발생한 국제법적 의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이 DDA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과의 상호주의를 주장하며 우리가 관세화를 진행하지 말자는 것은 기존 숙제를 다해놓고 추가 숙제에 대해 논의하는 친구들에게 기존 숙제도 하지 않은 우리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주의를 주장할 수 있다는 궤변이다.
이대로 2015년이 도래하면 한국의 WTO 협정 위반 상태가 성립된다. 쌀 수출국들은 WTO 제소를 비롯한 각종 통상 압력을 가할 것이다. 우리 측이 패소할 것이 뻔하며 1년 반이면 WTO 패소 판정이 확정되고, 2~4개월 정도의 이행 기간이 부여될 것이다. 즉 2년 후엔 승소국들에 주도권이 넘어간 상태에서 판정을 이행해야 하니 쌀 관세율, 수입쌀 관리방식 등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결정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대외신인도 타격 등 국익에 대한 다양한 피해가 발생한다. 그래도 우리가 버티면 승소국들이 무역 보복을 가할 것이고, 쌀과 같은 주요 교역 가능 품목의 경우에는 최소한 수억달러의 보복 액수가 부과될 것이다. 결국 국가 위신이 추락한 상태에서 무역 보복을 당하며, 불리한 조건으로 관세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WTO 의무면제를 획득해야 하는데 이것은 비현실적인 대안이다. 의무면제 신청의 대가는 MMA 물량의 대폭 증량이다. 필리핀도 쌀 관세화 연장을 위한 의무면제 신청 대가로 MMA 물량 증량을 자발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이미 넘쳐나는 MMA 물량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를 또다시 증량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결국 상식 있는 정부라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우리가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쌀 관세율을 책정할 수 있도록 금년 말까지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일부 농민단체들을 숙주(宿主)로 삼아 '버티기 게임'을 벌이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 이들의 소피스트적 궤변에 끌려다니며 정책 결정을 미루고 있는 정권, 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쌀 시장 개방을 대책 없이 미루는 것이 쌀 농가 몰락의 지름길인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국회의 공동 책임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14. 2. 19 시론
<원문>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18/20140218047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