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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경축사 有感 - 박효종
2003-08-18
8·15 경축사 有感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우리가 기대한 내용과 많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와 자주국방이라는 비전이 제시됐으나, 현 상황을 보면 더욱 절박한 현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출범 6개월이 다 돼 가지만 국정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참여정부는 국정 시스템이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시스템은 가동되지 못한 채 끝없이 새로운 갈등과 혼란이 분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각 집단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몫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이를 조정해야 할 정치권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당정 분리라지만 누가 집권 여당인지 알 수 없고 여당 자체가 정치적 혼란과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의 고뇌가 담긴 정치적 해법 제시를 기대했다면 과잉 기대일까. 이번 경축사에서 노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다. 미국에 의존하는 국방에서 자력 국방을 달성하자는 내용이다. 국민 가운데 자주국방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만큼 자주국방은 자명한 명제다. 그럼에도 그 자명한 자주국방의 구호에서 왜 석연치 못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 교수의 업적 가운데 ‘틀짜기’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사물 자체를 바라보기보다 그 사물을 일정한 틀에 놓고 본다는 것이다. 반 잔의 물이 있다고 해도 한 잔에 못 미치는 ‘반 잔밖에’ 안 되는 물로 비하할 수 있는가 하면, 빈 잔이 아닌 ‘반 잔씩이나’ 되는 물로 긍정적으로 틀짜기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의 자주국방에 대한 틀짜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북한 핵문제가 시급한 안보 현안으로 불거져 있는 상황에서 미군 없는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과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간단치 않다.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 등 모든 주변 국가에 대해 자력으로 대등한 방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자주국방일 수는 없다. 우리의 국력이 그렇지 못하다면 어차피 동맹관계에 의해서 적정 안보 수준을 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왕 우리에게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있다면, 이를 떨쳐버리기보다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과연 정부는 자주국방에 소요되는 재정을 감당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내년부터 국방 예산을 4%이상 증액할 정치적 의지가 있는가. 지금의 예산으로는 국군 장병들의 실질적인 복지조차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중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 작은 실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정치권내의 갈등, 사법부의 갈등 등,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태가 터진다. 특히 광복절 날 보수와 진보의 상호 적대적인 집회는 광복 이후의 정국을 방불케 하고 있다. 물론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갈등은 “나하고 의견이 다르지만 너도 옳을 수 있다”는 상호 공존의 갈등이 아니라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의 갈등이다. 더욱이 유감스러운 일은 노 대통령 자신이 이러한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치·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책무를 지닌 대통령이 갈등의 조정자나 해결사가 아니라 당사자가 돼 있다는 현실은 당혹스럽다. 사실 광복절은 누가 뭐라고 해도 통합의 의미가 크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던 날, 너와 나가 따로 없었다. 이념간의 차이도, 세대간의 갈등도, 지역간의 차이도 뛰어넘을 만큼의 구심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감격이라면 작년 월드컵 때에 경험했을 터였다. 그 때야말로 남녀·노소·청홍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았던가. 지금 그때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광복절은 통합을 위한 로드맵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자리였다. 물론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과 자주국방도 중요하지만, 국민적 통합없이 이들 목표는 한동안 영롱했다가 사라지는 무지개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은 출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하늘 아래 더불어 살 수 없는 원수로 치부하는 사태는 오지 말아야 한다. 통합의 정치야말로 참여정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8. 18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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