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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민족주의' 위험하다 - 정진영
2003-08-07
'낭만적 민족주의' 위험하다 북핵위기 해소를 위한 국제협상의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남북한과 주변 4강이 모두 참여하는 6자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고집해온 북한과 다자회담을 주장해온 미국 사이의 외교공방에서 미국이 먼저 1승을 거두었다. 북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협상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형식이 갖추어진 셈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을 포기하게 하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느냐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형식이 갖추어졌으니 문제해결은 시간문제라는 낙관론이 일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며, 우리의 전략을 신중하게 마련하고 추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는 김정일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다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붕괴에 직면했을 때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어느 경우나 대한민국을 볼모로 삼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핵 포기의 전제조건으로 체제보장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완벽히,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북한체제의 보장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북한 정권은 사악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정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과 북한이 과연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협상을 타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협상은 어디까지나 협상이다. 그리고 국제협상에서 각국은 매우 전략적인 행동을 한다. 협상 테이블의 형식을 둘러싼 공방에서 북한이 결국 미국의 방안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 핵무기 보유, 폐연료봉 재처리 완료 등 일련의 강경발언을 통하여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거의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반응은 북한에 대한 외교적-재정적 압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이른바 벼랑끝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당국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경제지원과 체제보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화국면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 역시 군사적 제재수단의 사용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라크전 이후의 중동질서 수립에 외교력을 집중해야 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편으로는 북한과의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과 유엔을 통한 대북 압박을 계속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직접적인 피해를 볼 수 있는 주변국들이 북한에 대하여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북한을 궁지에 몰 때, 북한의 협력적 태도를 기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애매한 태도는 북핵위기의 해결을 더욱 더디고 어렵게 만들 것이다. 한국의 대북 지원에 비례해서 북한의 시간끌기 작전은 성공할 것이다. 북한은 경제적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 한 핵카드를 결코 버리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진정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한다면 미국, 일본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까지도 설득하여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를 위한 국제적 압박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현 단계의 한반도 주변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낭만적 민족주의는 한반도를 다시금 주변 열강들의 세력각축장으로 만들고 민족의 장래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정진영 (경희대 국제관계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3. 8. 7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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