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에 걸린 弔旗 - 김병주 | ||
2003-08-07 | ||
한국경제에 걸린 弔旗 자살까지 부른 정경유착 … 喪中 현대車는 '백기'들어 장맛비가 더위를 식히기는커녕 한증막을 형성하는 요즘 삼복지간에 뜻밖의 죽음이 뭇사람의 눈을 적시게 하고 있다. 한 기업인의 죽음 때문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투신자살이라는 막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의 죽음이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는가? 기업가 집안에 태어나 단기간에 그룹 총수에 올라 최상위의 기업군을 지휘하던 55년의 세월이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지만 속으로는 괴로움이 많았던 것 같다. 대학시절 그의 전공이 국문학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문학소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뜻을 접고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선친이 한국의 대표적 창업 기업인이었기 때문이다. 런던 금융가에서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 그림을 보이며 조선소 건립자금을 마련하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긴 창업주 아버지 밑에서 여러 형제들과 기업인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란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3년 전 ‘왕자의 난’ 이후 그룹이 세 조각으로 분리될 때만 해도 종합상사, 전자, 상선, 증권 등 알짜 기업들을 물려받아 사실상 선친의 대통을 잇는 복된 기업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가 투신한 그날, 그의 그룹은 빈껍데기로 변해있었다. 전자(하이닉스)는 그의 손에서 떠났고, 종합상사·아산·금융회사 등은 적자투성이이고, 현대상선은 흑자지만 빚더미에 눌려있다.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국내외 경기부진 탓만은 결코 아니다. 기업인에게 죽음의 키스는 정치권과의 접촉에 있다. 폭 넓은 의미의 돈과 권력의 짝짓기, 정경유착은 동서고금 되풀이되는 관행이지만 특히 우리사회의 경우 그 중독성과 폐해가 심했다. 지금 프랑스에 피신 중인 다른 그룹 회장도 그러했지만 대권의 꿈은 선친을 유혹했다. 이것이 첫 번째 사단(事端)이었다. 선친은 소년기에 떠난 고향산천을 그리워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두 번째 사단이었다. 그는 선친의 유지를 따랐다. 그것이 진정한 효도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돌봐야 할 임직원과 봉사해야 할 국가사회 번영에 보다 큰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게 기업인의 참된 직분이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몇 가지 다짐할 사항이 있다. 우선 북한주민 민생에도, 평화정착에도 역행하는 종래 현금지급 방식의 대북사업은 중단해야 한다. 98년 개시 이래 현재까지 1조원 이상의 손실을 안긴 금강산 관광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다른 민간기업이나 공기업이 대신 떠맡다가는 줄줄이 함몰하게 돼 있는 구조다. 북한 아태평화위가 바라는 바대로 사업을 중단하자. 그들이 “특검의 칼에 의한 자살”이라 트집이지만 칼날의 손잡이에는 그들의 지문이 역력하다. 도산위기 때마다 방북한 그가 반대급부로 얻은 게 무엇인가? 김정일 표현대로 고인이 ‘입 찢어지게’ 좋아했다는 개성공단 사업도 경제성이 의문시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의 죽음으로 몇몇 의혹대상 정치인들의 속앓이가 진정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침묵이니까. 거액을 갈취한 정치인들에게는 그의 말이 바로 극약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자금 공개를 포함한 정치개혁은 필수과제다. 그리고 길게 보면 정부가 인위적으로 재벌해체를 도모할 필요가 없다. 세대교체기에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계열 분리되고, 해체 정리된다. 마지막으로 수익성 계산에 아둔한 기업인은 몰락한다는 교훈이다. 상중(喪中)에도 분리된 다른 계열에서는 경영진이 노동자 경영참여, 임금삭감 없는 주5일제 등 백기(白旗) 든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국기업, 한국경제의 앞날에 조기(弔旗)가 올려지고 있다. 서울은 지금 고인의 명복을 비는 향내가 짙다. 그러나 우리는 울음을 삼키고 이를 악물어야 한다. 그만큼 나라경제가 걱정이다. 문학 지망생, 고인은 편히 잠드시라. 김병주 (서강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3. 8. 7 시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