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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서 던져진 아이 - 함인희
2003-07-24
아파트에서 던져진 아이 위기의 사회, 파탄난 도덕 언젠가 서울 근교 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선배가 들려준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개인의 자살 뒤엔 왠지 사회적 타살의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극심한 생활고를 비관한 엄마가 두 명의 자녀를 먼저 아파트 14층 난간 위에서 던져 숨지게 하고, 한 명은 품에 안고 함께 뛰어 내린 사건. 그 사건의 무모함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어떤 사연의 절박함을 헤아려 보기도 전에, 이번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 녀석이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또다시 희생되는 것이 진정 두려워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지 않은가. 최근 우리는 '하찮은 일상'에서조차 총체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한데 더욱 심각한 건 이 위기 앞에서 모두가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이다. 보다 앞서 가족 위기를 지나온 서구사회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가족이 전담해온 복지기능의 약화와 국가의 복지기능 강화가 밀접한 연계를 가지며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곧 서구 복지국가의 출현은 개인이나 개별 가족의 노력만으로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받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누구나 생애 주기의 어느 단계에선가 겪게 될 제반 위기를 고려해 '포괄적 사회 안전망'을 구축한 결과인 것이다. 반면 우리의 상황 인식은 시작부터 미숙하기 그지없고 해결방안 또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미 가족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둘러싸여 위기 상황이 끊임없이 돌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족문제는 가족이 알아서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핵가족 책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족을 방기하고 위기를 방치하고 있기에 드는 생각이다. 결국 가족의 변화 속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사회지체(遲滯)'가 가족 분열과 혼란, 파탄과 해체의 악순환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의 제도화로 야기된 바, 고용 불안 및 잦은 실직으로 인한 가정경제의 불안정과 빈곤의 악순환을 어느 누군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제 '가장(家長)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함께 너나 없이 돈벌이 전선에 차출된 상황에서 어느 가족인들 양육 및 부양 기능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겠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와 더불어 노인성 질병의 부담이 증대되고 빈곤의 노인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효의 미덕인들 경제적 부담을 해소하고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위기가 고조될수록 그로 인한 부담과 희생은 사회적 약자의 몫이듯, 가족의 위기 관리 능력이 무력화될수록 가족 안의 약자인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 집단이 이중삼중의 피해자로 부상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초등학생의 자살로 다시금 그 폐해의 심각성을 둘러싸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 모은 가족폭력 또한 더 이상 개인의 병리적 인성이나 가족의 불행 차원에 머무를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197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조차 '결혼 허가증은 폭력 허가증'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만큼 가족폭력은 가정의 비밀스러운 일상사였지 강력한 제재를 수반하는 범죄가 아니었다. 가족폭력이 심각한 폭력으로 규정되고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과정 속에서 개인의 생명권이 보호되고 인권의 의미가 확장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동안 무수히 많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은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도덕하다"고 했다. 사형제도 폐지론자가 남긴 이 명언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참(眞)이다. 삼시 세 때 굶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회,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어린 아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회, 이토록 부도덕한 사회 속에서 어찌 생명의 귀중함을 인정받고 개인의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 시민회의 여성포럼 정책위원) 출처 - 중앙일보 2003. 7. 24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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