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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원칙, 정부가 무너뜨린다 - 류동길
2003-06-21
법과 원칙, 정부가 무너뜨린다 조흥은행 노조는 막다른 길을 가고 있다. 문닫은 점포가 늘고 빠져나간 예금이 7조원이나 됐다. 전산망도 마비 직전이다. 조흥노조는 은행원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20일 전국 주요 고속도로에서 시위를 벌여 교통을 마비시켰다. 오늘 전교조는 연가(年暇)투쟁으로 일부 학교는 수업에 차질을 빚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임무를 포기한 것이다. 철도노조는 철도구조개혁법안 국회 통과를 반대하는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7월 초순까지 거의 매일 파업, 결의대회, 조업단축 등이 예정돼 있다.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힘으로 밀어붙여 목적을 이루려는 모습만 두드러진다. 국민의 혈세가 공적자금이란 이름으로 수조원이 투입된 조흥은행의 매각은 노조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노조가 왜 무리수를 쓰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지난 1월 14일 조흥은행 노조대표, 금융노조 대표와 비공개로 만나 “제3자 실사를 한번 더 해보고 독자생존 능력을 검증해본 뒤, 매각 여부를 결정하자”고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조측은 노 대통령이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되는 매각대금의 감소로 국고수입 손실을 초래했고 매각 시기가 늦춰져 시간만 낭비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 개입의 실패 사례다. 경제부총리는 불법파업에 나선 조흥은행 노조와 협상했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은행의 경영 문제를 노조와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정부가 스스로 법과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문제가 제대로 풀릴 턱이 없다. 문제가 꼬인 것은 조흥은행만이 아니다. 이미 두산중공업사태와 화물연대파업 해결 과정에서 정부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깼고 공정성이 결여된 결정을 했다. 개별 사업장에 정부 당국이 직접 뛰어들고 청와대가 나서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러니 노사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어지러운 건 경제뿐이 아니다. 납치·성폭행·살인·조폭 등의 낱말이 자주 들린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당시보다 어렵다고 한다. 국민들은 대통령만 쳐다본다.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 시기인가. 그러나 대통령은 특강에 관심을 쏟는다. 대통령은 전국세무관서장, 전국 경찰지휘관, 중앙부처 실국장들에게 한 특강에서 “각 부처에 공식 비공식 개혁주체 세력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 말에 시비가 일자, 청와대는 “공무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명료했을까. 그런데 “나한테 줄 한번 서봐라”고 했으니 홍위병 소리가 나온 것이다. 또 “개혁주체 얘기했더니, ‘문화혁명 하는 거냐’고 비판한다”며 언론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내가 줄서라고 농담을 했다”는 표현도 했다. 대통령이 스스로 국정좌표와 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말은 리더십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대통령은 국정을 펴나가는 데 필요한 말은 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천금의 무게를 가진다. 그런데 대통령의 말이 여러 갈래로 해석돼 그걸 다시 해명하는 일이 잦다. 외국어도 아닌 우리말을 다시 통역해야 한다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대통령의 탈(脫)권위주의는 매력적일 수 있지만 대통령의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대통령 말은 쉽고 분명해야 한다. 대통령은 특강에서 대상자들에게 개혁을 함께 하자는 뜻을 전하고 있다. ‘경제가 힘’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동북아 경제중심 정책을 그리는 청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지금 파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불법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이다. 명백한 불법을 보면서도, 불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걸 강조만 한다. 강조할 필요가 없는 걸 강조하는 건 그럴 뜻이 없다는 걸 나타내는 게 아닐까. 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다. 소비자는 움츠려 있는데 노동자만 보인다. 생산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장을 하느니 차라리 부동산 투자라도 할 걸 하고 후회하는 기업인도 있다. 무엇부터 풀 것인가. 시급한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지만 법과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류동길 (숭실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3. 6. 21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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