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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모르는 게 자랑인가 - 이영조
2002-05-07
외교 모르는 게 자랑인가 민주당의 국민참여 경선은 그 동기야 어쨌든 지명도가 떨어지는 후보가 선발주자의 프리미엄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정치 실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선거인단의 대거 불참과 후보들 사이의 이전투구식 싸움으로 그 빛이 바랜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이 기대한 것은 경선 과정에서 후보들의 자질과 비전이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이런 기대는 크게 충족되지 않았다. 음모론이다 색깔론이다 해서 자질이나 비전보다 외적인 문제들로 후보들이 시비를 벌이는 통에, 정작 대통령이 될 만한 바탕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필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비전을 따져야 할 때이다. 이런 참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관련하여 뜻밖의 발언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의 한 지구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들을 했다. “노무현으로 인해 미국이 불안해 한다고 믿는 한국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 이것은 사대주의 문화의 잔재 아니냐” “후보자가 되면 미국 조야(朝野)에 가서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 볼 일 있으면 간다. 별 볼 일 없어도 한가하면 간다. 단 국내 정치용으로 사진 찍기 위해서는 가지 않는다”…. 우선 이렇게 직설적인 발언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언제 어디서든 간에 적절치 못하다. 너무도 비외교적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의 말 속에 엿보이는 대미관(對美觀)과 외교관(外交觀)이다. 과연 그가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한국을 이끌 자질과 국제적 감각이 있는지 의심을 품게 한다. 그의 최근 발언으로 판단해 보면 ‘노 후보가 보는 미국은 같은 주권국인 한국에 대하여 시시콜콜 간섭하는 시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이같은 미국에 기대는 것은 종속이고 굴종이다, 따라서 굳이 미국에 저자세를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태도’인 것으로 분석된다. 때로는 고압적으로 비치기도 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과 태도가 확실히 기분 나쁠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노 후보의 대미관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방문을 ‘국내 정치용 사진 찍기’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국내 정치용 사진을 찍으러 간 그들이나 미국에 굳이 가지 않겠다는 노 후보나 국내의 여론과 인기를 계산에 넣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게다가 정치인들이 미국 조야의 인사들을 방문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웬만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다 그렇게 한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 대해 강경해야 인기가 올라가는 나라의 지도자들도 있다. 그들도 모두 국내 정치용 사진을 찍으러 가는 것일까.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국내 정치 때문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 때문에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미국과 관련된 노 후보의 최근 발언은 적어도 대한민국의 최고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발언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국익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감정이나 인기 차원을 떠나 어디든 찾아가 세일즈 외교를 벌이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일류 외교관이어야 게다가 미국이 어디 보통 나라인가? 싫든 좋든 미국은 대한민국의 진로와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주변 4강 가운데서도 으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이익과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는 것은 한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믿음이나 감정을 넘어서는 과제이다. 강대국이라면 덮어놓고 한 수 접어주는 사대적 사고에 대해 비판적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을 애써 드러내 밝히고 ‘자주’와 ‘독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결코 세련된 행동이 아니다. 동북아의 불안정한 안보상황,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 경제외교의 확대 등으로 해서 앞으로 주변 국가와의 외교적 접촉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에 비추어 차기 대통령은 국제 정세의 추이를 꿰뚫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탁월한 외교능력을 갖춘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전문 외교관의 몫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정상외교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추세이다. 따라서 대통령 자신이 일류 외교관이 될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 후보는 일생에 외국 여행을 한 경험이 세 번밖에 없으며, 미국은 관광을 위해서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의 지도자로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드러내놓을 자랑거리는 결코 아니다. 이영조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사무총장) 출처 - 주간조선 2002. 5. 6 태평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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