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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건 경쟁의 허실 - 함인희
2007-06-08
슬로건 경쟁의 허실 대선 주자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가"일하겠습니다"를 슬로건으로 채택했다는 소식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는 감성정치 시대에 슬로건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쯤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으리란 생각이다. ● 역대 정권 슬로건에 거품 가득 미국에서 낙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슬로건 경쟁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18세 이상 59세 이하 여성 2명 가운데 1명이 낙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는 우리네 상황에선 낙태가 선거 쟁점화 된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1990년대 미국 선거에선 낙태 찬반 여부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 낙태 불허를 주장하는 진용에선 '생명권 옹호(Pro Life)'란 슬로건을 내걸었고, 낙태 찬성을 지지하는 진용에선 '선택권 지지(Pro Choice)'를 슬로건으로 채택했다. 전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도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음을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한 반면, 후자는 임신이든 출산이든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해 주체적 결정권을 소유함이 타당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과는 낙태 반대론자들의 승리였다.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겠지만, 적어도 슬로건 경쟁에선 생명권을 앞세운 낙태 반대론자들이 선택권으로 포장한 낙태 찬성론자보다 분명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후일 낙태 찬성론자들은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아쉬움의 일단을 이렇게 표명했다. "낙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실상 우리 모두는 생명을 찬양하는(Pro-Life) 입장에 서 있다. 다만 누구의 생명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무게를 두었다면, 낙태 찬성론자들은 지금 살아있는 여성의 생명을 더 존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차는 떠나간 뒤였다.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당은 '진보' 이미지를 열린우리당에 선점 당한 이후 이에 맞설 발전적 대안 이미지 창출에 실패하면서, '보수 및 수구' 이미지에 발목을 붙잡혀왔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는 정당별로 뚜렷한 이념적 차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보라는 슬로건을 어이없게 빼앗긴 한나라당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더 더욱 진보의 반대말이 보수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는 피해의식이 배가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보라 함은 공공의 선의와 발전적 이미지를 담은 중립적 개념으로서, 좌파 우파를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의미함이 사전적 의미의 상식 아니겠는지. 슬로건 "일하겠습니다"는 보수 대 진보 구도의 진부함 및 식상함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후보자의 이미지를 역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선 공들여 만든 흔적 또한 역력하다. 반면 "누구는 그럼 일하지 않았단 말이냐"는 시니컬한 반응과 "일은 저 혼자 한단 말이냐"며 독선적 냄새를 맡는 비판의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 실체 정확히 가리는 혜안 필요 그간 국민은 정부 앞에 멋진 수사를 동반하는 정권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과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는 각각의 슬로건에 충실히 부합하는 정부였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렇다면 슬로건이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의 거품과 실체 사이의 괴리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능력, 더불어 올바른 정책과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의 차이를 확실히 선별할 수 있는 혜안이 뒷받침될 때만이 시행착오의 반복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하겠습니다"를 향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더불어 '그 일들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은 오로지 우리네 몫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바른사회 정책위원) 출처 - 한국일보 2007. 6. 8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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