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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들'은 없다 - 정갑영
2002-10-28
우리에게 '그들'은 없다 누가 진정으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일까? 선거과정을 통해서 여과되는 '민주주의적 합의'는 과연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묘하게 조작된 여론과 선전의 블랙 홀 속에서 국민들이 '동의 없는 동의'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정치는 물론 경제와 문화까지도 국민을 볼모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비판으로 널리 알려진 노엄 촘스키의 저서 '국민을 볼모로 한 이익'에 나오는 통렬한 사회비판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국민은 오히려 '그들'의 볼모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는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라고 번역된 것 같다. 과연 우리에게 '그들'은 누구인가. 정권교체기에 수없이 많은 '그들'이 등장하고 있다. 국민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다는 사람도 많고, 역사적 소명에 부름받은 사람도 많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감언이설도 많다. 어디 그뿐인가. 철새처럼 오락가락하는 사람도 많고, 대권(大權)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만용도 서슴지 않는 투사(?)도 수두룩하다. 정책보다 폭로를 일삼는 의원님도 많고,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확대재생산하는 언론도 많다. 사시(社是)보다 사시(私是)에 흔들리기 때문일까. 사회면 가십에나 오를 기사를 1면에 도배하는 언론에도 국민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최소한의 책임도 망각한 채,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대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국회에는 1년 이상 표류된 개혁입법이 쌓여 있지만, 행여 한 표라도 다칠까 아예 심의조차 못하고 있다. 정치개혁 입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스산업의 민영화와 토지공사.주택공사의 합병안도 모두 낮잠만 자고 있다. 가부간 결론을 내려야 관련업계가 안정을 찾고 본업에 충실할 것 아닌가. 정쟁의 제물로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이 부담해야 할 비용만 늘어갈 판이다. 선거를 앞둔 관료사회에서도 수많은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저버린 지 오래고, 이곳저곳에 '보험'을 드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공복의 권한을 '떠오르는 태양'을 위해 남용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정권교체기의 불확실성이 복지부동의 자세를 더욱 더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다 언제 날벼락을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이래저래 물 건너가는 일들은 많아지고, 국민경제에 주름살만 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그들'이 많은 것일까? 주변에 가득찬 '그들'을 보면, 국민과 '그들'을 구별하기조차 힘들 때가 있다. 그래도 나라가 굴러가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그들'과 다른 이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그들'에 오염돼 찾기 힘들 뿐이다. '그들'이 많은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그들' 역시 시장의 행태에 따라 행동하는 규범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선된 후에는 어찌됐든 우선은 공약(空約)이 효과가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여부를 불문하고 언론이 받아주니까 무책임한 폭로도 서슴지 않는다. 악명이라도 신문에만 많이 나면 당선되기 쉽다고 하지 않는가. 국민들이 눈을 감고 뽑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자신의 부고(訃告)만 빼고는, 어떤 명목이라도 신문에 올라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의 속성을 좇는 일부 관료들도 할 말은 있다. 정권에 줄을 잘 서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언론도 겉으로는 시장을 푸념한다. 선정적인 기사를 크게 터뜨려야 신문이 팔린다고 한다. 기사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은 것일까. 이렇게 보면 '그들'은 항상 시장에서 지극히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누가 '그들'의 규범을 바꿀 수 있겠는가. 우리가 먼저 행동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유권자로서, 독자로서, 당당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소시민인 우리가 '그들'을 '시장'에서 응징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줘야 한다. 鄭甲泳 (연세대 경제학 교수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중앙일보 2002. 10. 28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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