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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헌법적 위기를 과장하는가? - 김일영
2007-03-12
누가 헌법적 위기를 과장하는가? ‘87년 체제를 극복하자’가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사사건건 싸우는 보수와 진보가 기묘하게도 이 문제에서만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주장하는 의도와 내용은 전혀 다르다. 보수는 48년의 건국체제, 63년의 산업화체제, 87년의 민주화체제를 넘어서 2008년에는 선진화체제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87년 체제의 극복을 말하고 있다. 반면 진보는 87년 체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 뿐이니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그것을 극복하자고 하고 있다. 양쪽 주장이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선진화도 절실하고 양극화 극복도 시급한 게 작금의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보의 논리에서 다음 두 가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는 개헌을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켜 87년 체제를 극복하자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정권교체가 일어나면 한국 헌정체제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식으로 과장하는 버릇이다. 87년 체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87년 체제의 성공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게 지난 10년간 두 차례나 진보정권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87년 체제 성공의 증거인 진보(정권)가 스스로의 모태인 87년 헌법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점에서 87년 체제는 성공의 위기(crisis of success)를 겪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헌법을 손본다고 실질적 민주주의가 진전될까? 양자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중간에 빠진 요인들이 너무 많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헌법 규범의 내용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정권이 어떤 정책을 시행하느냐의 문제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근자의 개헌 논의를 특정 정권에 의한 정책의 실패를 제도(헌법)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진보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정권교체를 한국 헌정체제의 위기인 양 과장한다는 점이다.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아 민주적 헌정체제를 보호하자’는 것이 정치적 선전구호로는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학자’들까지 이런 말을 하면서 그것을 개헌논리로 연결시킬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적 헌정체제의 위기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드는 예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히틀러의 등장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는 대중민주주의 시행 초기에 노동자 계급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부르주아적 중산층이 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기로에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학자인 헬러(H. Heller)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계층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여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기존의 자유적 법치국가를 사회적 법치국가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2007년 한국 민주주의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와 같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가? 우선 사회경제적 위기를 빙자해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부인하고 권위주의로 돌아가려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가? 거의 없다. 다음으로 헬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도입하려 했던 사회국가 원리는 우리의 87년 헌법에 이미 상당 부분 도입되어 있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개헌하자는 논리는 애초부터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헌법적 위기를 과장하는가? 헌법적 절차에 따른 정치과정의 진행을 헌정체제의 위기라고 호도하려는 세력은 누구인가? 현재의 위기는 정권과 정책의 위기이지 체제의 위기가 아니다. 민주적 헌정체제는 굳건하며 국민들은 지난 정권과 정책에 대해 책임을 물을 뿐이다. 이 점에서 현재의 위기는 진보의 위기에 불과하며, 진보의 위기를 대한민국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 바른사회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7. 3. 10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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