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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걸음하는 한국의 안전시계 - 함인희
	2006-03-28
제자리걸음하는 한국의 안전시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석유통에서 석유가 줄줄 새고 있는데 석유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성냥불을 켠 채 석유통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한다. 한국인의 안전불감증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함축한 비유일 게다. 롯데월드의 무료 개방 이벤트가 낳은 사고 기사를 접하자니, 우리네 안전시계는 여전히 소득 1000달러 수준에 머무른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 기우가 고개를 든다. 기사 내용을 곰곰 들여다보니 시간과 장소만 바뀌었을 뿐, 언젠가 읽어본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무료 개방이란 달콤한 유혹에 예상치 못한 인파가 몰렸다는 변명도 꽤나 익숙하고, 예측불허를 이유로 소수의 직원만을 추가 배치했을 뿐 안전 대비책 마련엔 무심했던 주최 측의 안이함이 사고를 불러일으켰다는 원인 분석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유명 가수들이 대거 출연하기로 예정된 방송사 주최의 공연을 보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물밀듯 밀려들어 사망자까지 냈던 사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왜 똑같은 유형의 사고가 근절되지 않은 채 재발을 거듭하고 있는지 진정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대형사고 뒤엔 늘 안전불감증이 낳은 인재(人災)였다는 자성이 후렴처럼 따라붙건만,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길 망각하는 우리네 기억상실증이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그간 우리네가 경험했던 사건 사고의 와중에 누가 일차적 피해자였던지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사회적 약자들이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이들은 대개 산간벽지나 침수지역에 거주하는 농민 아니면 태풍 다발 지역에 거주하는 어민이요, 모처럼의 행사에 들뜬 마음으로 왔다 난데없이 변을 당하는 이들은 노인 아니면 아이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사고만 해도, 유동인구 1200만명을 넘나드는 메가톤급 도시에 청소년층이 즐길 수 있는 놀이시설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오락문화에 목말라 있던 젊은 신세대들이야말로 1차 피해자가 아닐는지. 주 5일근무제 이후 여가시간은 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여가 선택지의 다양화 및 수준 높은 여가문화의 확산은 요원한 상황에서, 현란한 오락시설의 무료 개방이 야기한 여파가 쉽게 통제 불능 수준에 이르렀던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긴 하나 어리석은 문제 제기 속에 현명한 답이 준비돼 있는지도 모를 일. 무엇보다 안전 감각은 하루아침에 체화되지 않는 만큼 어린 시절부터 안전불감증 예방을 위한 백신 주사를 맞도록 할 일이다. 너나없이 기본 질서를 지킬 때만이 우리의 안전이 확보되고 나아가 모두의 자유가 확대됨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론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놀이나 오락으로 채울 게 아니라, 10인10색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다종다양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격조 있는 일상문화의 창출 또한 우리네 과제일 것이다. 눈앞에 놓인 자유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불필요한 소비와 과도한 쾌락에 몰두하기보다는, 각자의 여가 공간에서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채워갈 수 있는 성숙한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 아쉽기만 하다. 소외된 층을 겨냥하여 문화 향유 기회를 충분히 마련해주는 것도 롯데월드류의 사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값진 교훈일 것이다. 곁눈질할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는 과정에서 우린 양적 성장을 위해 질적 수준을 상당 부분 희생해왔다. 안전불감증은 그로 인해 파생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것인 바, ‘위험사회’의 반복 및 재생을 근절하지 못한다면 선진국을 향한 꿈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바른사회 여성포럼 정책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6. 3. 28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