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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이어야 한다 - 송복
	2002-09-02
태극기이어야 한다 현 정부는 마치 19세기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전(前)세기도 아닌 전전(前前)세기의 사고와 시각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부산 아시안게임 개폐회식에 태극기도 인공기도 아닌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화해도 협력도 아니고 오직 19세기식 민족 ‘맹신’이며 ‘맹목’ 그 자체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을 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대한 ‘한 민족’임을 거부하고, 최대한 서로 다른 국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핏줄이라 해도 이미 분리된 민족이고, 그 분리는 체제든 삶의 양식이든 필연적으로 각기 다른 국가로 발전해서 다른 이웃 나라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게 하는 사고의 틀을 만드는 길이며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길이다. 부산 아시안 게임은 그 틀과 그 증진을 높이는 절호의 찬스다. 한반도기가 아닌 태극기와 인공기가 다른 나라 기(旗)와 다름없이 입장하고 다름없이 휘날릴 때 남과 북의 동포들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각기 다른 국가가 남과 북에 있음을 사실화하는 것이다. 더구나 아시안게임은 민족 아닌 국가 단위로 이뤄지는 게임이다. 거기에 남쪽은 주최국이다. 태극기와 인공기를 같이 입장시키는 것은 싫어해도 마다할 수 없고 반대해도 뿌리칠 수가 없다. 그 뿌리칠 수 없는 상황에서 남(南)은 인공기에 대범하고 북(北)은 태극기에 놀라지 않는 것이다. 북쪽 동포가 언제 태극기를 보았겠는가, 심지어는 북으로 지원물자를 실어 보내는 우리 선박마저 그들 영해에선 태극기를 내리게 하지 않는가. 공짜로 받는 지원물품에 한국이라는 이름도 못붙이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북한 아닌가. 그런 북한에 이번만큼 태극기를 기탄없이 보게하는 때가 있을까. 이번만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인식시키는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굳이 한반도기를 들고 나오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북을 상징하는 것도 아닌, 말할 것도 없이 남북의 동포를 함께 상징하는 것도 아닌, 임시 조작물에 불과한 그 깃발을 꼭 들고 나오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에는 엄연히 남쪽의 이념과 가치를 드러내는 태극기라는 최고 상징물이 있고, 북 또한 어느 나라보다 신성하게 고수하는 인공기라는 상징물이 있다. 그 상징물을 제쳐놓고 임시 조작물을 온 세계가 보는 앞에 상징물로 내세운다면 태극기든 인공기든 그 임시조작물의 하위가치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북쪽이야 뭘 상징으로 내세우든 손해날 것이 없다. 경기 주최국도 아니고 경기참가비용을 다른 나라들처럼 내는 것도 아니다. 남에서 모든 비용을 다 지원 받으면서 남쪽의 상징인 태극기를 들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 큰 득은 없다. 북쪽 주민들에게 남쪽의 태극기쯤이야 우리 공화국에서 못들고 나오게 하면 못 들고 나오는 그런 ‘하찮은 깃발’이라는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주지시킬 것인가. 남은 우리 공화국 앞에 제대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또 얼마나 고취할 것인가. 그렇다면 정부 당국은 무엇을 얻자고 제나라 깃발조차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가. 그것이 만일 남북 화해협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19세기식 민족‘맹신’의 사고다. 진정한 화해협력은 남쪽에 대한민국이라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엄연한 국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북쪽 주민들에게 강력히 인식시키는 데서 이뤄진다. 지난 5년간 북쪽은 ‘퍼주기’란 말이 나올 만큼 남쪽의 지원을 받았다. 그 지원을 그들은 국가간의 시혜나 원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만도 유만부동인 ‘조공(朝貢)’ 정도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이제 또 현 정권을 유인해 한반도기를 들고 나오게 하는 것은 남측의 국가상징마저 포기토록 해서 국가인정을 사실상 거부케 하는 데 그 노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반도기만큼 남북관계에 백해무익한 것이 없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조선일보 2002. 9. 2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