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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에 관한 비전을 세우자 - 박효종
	2006-01-02
권력에 관한 비전을 세우자 병술년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면 새해가 찾아오는 법이지만, 그때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강물이 변함없이 흐르건만, 같은 물이 아니라 늘 새로운 물이 흐르는 이치와 같다. 이 새로운 해에 우리는 당연히 기대와 설렘을 갖는다. 부자는 부자대로 꿈을 갖는다지만, 삶이 구차해도 부자될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새해다. 한국정치를 생각하면 기대보다 회한이 앞선다. 사고와 깽판을 많이 친 정치가 한국정치가 아닌가.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 대치를 보라. 그럼에도 한숨과 회한으로만 일관할 수 없는 이유는 당장 오는 5월에 지방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에서 대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야가 격돌하며 정치지형이 한바탕 요동칠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승리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이기는 데만 신경을 쓴다면, 정치권력의 본래적 의미는 사라지지 않겠는가. 한국의 민주화는 역동적으로 진전돼 왔다. 여야 정권교체도 이루었고 마이너리티 대통령도 두 번이나 뽑는 등 헌정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인식과 비전은 권위주의 시대에 비해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정치권력은 ‘설득형’이라기보다 ‘지시형’이고 ‘협치형’이 아니라 ‘독점형’이다. 또 ‘분산형’이라기보다 ‘집중형’이고 ‘봉사형’이 아니라 ‘계몽형’이다. 왜 이럴까. 정치권력에 관한 한 구태의연한 비전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이타주의자다. 물론 그 이타주의가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고사리손의 이타주의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은 자신의 자아실현이나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사람이 아닌가. 정치권력이 이타적 현상이라고 해서 비열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바그다드의 왕, 하룬 알라시드는 첫 번째 아내의 불륜에 격분하여 그녀를 처형한 후 계속해서 하룻밤만 같이 지낸 여자들을 처형한다. 하룬은 고위관료의 딸인 세헤라자데까지 동침한 후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세헤라자데는 1000일 동안 밤마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왕을 감탄시켜, 마침내 자신에 대한 형의 집행을 연기시키고 하룬과 결혼하게 된다. 오늘날 이런 노골적인 권력 오·남용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보다 음험하게 이루어지는 ‘꼼수적 행태’는 허다하다. 예를 들면 내심으로는 찬성하지만, 다수의 지지로 통과될 만한 정책과 법안에 대해 일부러 소수의 입장을 자처함으로써 오로지 ‘튀기’ 위해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정치인도 있다. 유권자들 앞에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도 한다. 한편 링컨을 어려서부터 좋아했으며, “나의 이상적 인물은 링컨”이라고 공언함으로써 링컨을 좋아하는 유권자들로부터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지지를 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행태들은 진정성을 결여한 속물적 형태가 아니겠는가. 한편 ‘봐주기 인사’나 후계자 지명을 통하여 자신의 주위를 맴돌거나 줄을 선 야심찬 사람들에게 정치적 야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발휘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다. 반대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야심가들의 야망을 좌절시킬 수 있는 권한도 있다. 당연히 이러한 특권은 불법적인 목적을 위해 오·남용되게 마련이다. 대권을 일단 거머쥐게 된 승자가 최고위급 인사에서 말단 인사까지 장악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정부의 위원회건, 공공기업 인사건 ‘전리품 나누듯’ 낙하산 인사가 유행이며, 파문이 일면 선출된 권력의 재량권임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하다못해 스포츠계 인사에도 권력의 입김은 거세다. 또 법원이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도 보수 일색이라고 비난하면서 진보 성향의 인사로 교체를 추진한다. 정부·여당은 모든 것을 권력친화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혈안이 돼 있어 기업인이 사업을 하거나, 방송사가 방송을 하는 데도 과천서부터 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치권력의 눈 밖에 나는 일을 극구 피하는 ‘눈치정치’가 성행한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승자독식, 권력독점의 정치가 실감나는 곳이 한국이다. 민주화가 공고해지고, 제왕적 정치가 퇴색됐다고는 하나 ‘블랙홀 정치’는 여전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모든 걸 빼앗긴 야당은 권력소외감과 권력금단현상에 겨워 정치·사회·경제의 모든 문제들을 정부·여당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야당이 집권하면 ‘정치의 실패’를 일거에 반전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 결과 ‘일상적인 것이 정치’가 된다.‘정치의 일상화’는 정부·여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이에 반발하는 야당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여당은 국민이 이 정도 잘 사는 것이 다 자신들의 덕이라고 강변한다. 외교도 초과 달성했고 남북관계도 최고 상황이며 한미동맹도 더 이상 굳건할 수 없다고 자랑하는가 하면, 경제도 지금은 안 좋지만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야당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어려움이 여당의 실책에 있다. 이처럼 정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자리잡음으로 인하여 ‘일상적인 것이 정치’가 되면, 어떤 사태가 야기될까. 정치가 일상적인 것이 될 때 우리는 리바이어던의 포로가 되고 각자의 영역에서 자율성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정치권력의 가장 커다란 죄악은 독선과 아집 및 과대망상이다. 자신들의 비전대로 세상을 끌어가거나 바꾸려 하고 또 사람들이 자신들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고 분노하며 불평하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과대망상의 정치인들은 때때로 ‘정치적 나르시시즘’이나 ‘정치적 메시아니즘’에 빠지기도 한다. 개혁전도사를 자처하고 몽매한 사람을 일깨우는 계몽주의자로 자부한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며 정의와 개혁을 외친다. 또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철학자의 일”이라는 마르크스의 경구다. 우리는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회있을 때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열창하는 것이나 ‘태평가’를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정의의 여신’을 참칭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내일 이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칸트의 준칙이나 “정의가 없는 공동체는 강도집단과 같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는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권력자들이 앞장서서 정의를 외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복수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의 칼’은 흔히 ‘복수의 칼’이 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 사회를 보면 정의의 여신인 ‘디케’는 거의 언제나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진 권력은 ‘설득의 정치’를 외면하는 오만한 권력이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냉소했다. 그들은 권력자 앞에 무릎을 꿇는 관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이성적 존재들 사이의 정상적 관계는 아니며, 설득만이 이성적 관계라는 것이 아테네 사람들의 권력비전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의 민주권력도 설득하거나 설득당하는 권력이어야 한다. 이러한 권력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치인 가운데 최고등급인 ‘국가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는 5월의 지방선거를 통해 이러한 ‘국가인’들이 다수 출현하기를 소망한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문화일보 2005. 12. 3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