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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외교, 현실성과 냉정함으로 - 제성호
	2005-09-16
정상외교, 현실성과 냉정함으로 해마다 9월 중순쯤이면, 세계의 이목은 뉴욕 맨해튼으로 쏠린다. 유엔의 정기총회가 개최돼 글로벌 어젠다를 둘러싸고 다자외교가 본격 가동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유엔 창설 60주년이란 상징성을 감안해 유엔정상회의(고위급 본회의)가 총회 벽두에 열렸다. 170여개국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이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현지 시간 14일 오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개막연설을 한 데 이어 추첨 순번에 따라 각국 정상들이 기조연설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5번째로 본회의 단상에 올라, 유엔 외교에 데뷔했다. 노 대통령은 이 기조연설에서 “21세기 국제질서는 모든 나라가 공존하며 함께 이익을 누리는 공동번영의 질서가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제국주의적 사고·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강대국 중심주의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 개혁(비상임이사국 증설)을 언급하면서, 과거를 문제삼고 강대국들을 꼬집은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은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하고 장래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할 말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웃 나라들로부터 오해와 불신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제국주의, 잔재 청산, 강대국 중심주의 등 외교용어론 다소 낯선 단어들이 그런 단서를 제공한다. 평소 노 대통령의 화두인 ‘과거청산’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제국주의는 일방주의, 식민지 건설, 경제적 착취, 불평등을 내포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19세기의 산물이다. 그 잔영은 20세기 중엽까지 나타나지만, 오늘날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주의 잔재 거론은 특정 국가의 정책을 재단하는 정치적 오만 혹은 지나친 피해의식의 표출로 비칠 수 있다. 또, 9·11 이후 강대국 주도의 반테러 국제질서 재편을 제국주의로 매도한다면 잘못이다. 일본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의 행태에 얄미운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일본은 좋으나 싫으나 함께해야 할 숙명적 동반자이다. 굳이 유엔 무대에서까지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유엔 분담금(전체의 19.5%)을 내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꿈꿀 충분한 명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견제 일변도 대신에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게 보다 신사적인 대응이 아니었을까? 더불어 한국의 대북정책이, 그간 미제(美帝)의 남한 식민지론을 주장해 온 북한의 ‘민족공조론’에 호응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적 사고, 강대국 중심주의 운운은 동맹국인 미국을 자극할 수 있다. 국제연맹의 실패 경험을 기초로 탄생한 유엔은 상임이사국 제도와 거부권 도입에서 보듯이 강대국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대국 중심주의의 부정은 유엔의 메커니즘과 맞지 않다. 강대국의 역할을 긍정하면서 응분의 국제적 책임을 말하는 게 더욱 ‘유엔적’이다. 동북아시아 정세는 강대국들 간의 권력정치와 함수관계에 있다. 분단질서와 북핵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보지 않을 경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따라서 유럽연합(EU)식 동북아 질서를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국제정치는 이상주의적인 도덕의 세계가 아니다. 비대칭적인 힘이 맞부닥치는 냉엄한 현실의 세계다. 주변 4강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중견국으로서 국익의 극대화와 종국에는 평화적인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정상외교의 수행자인 국가원수의 발언에는 무게와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소득 없는 큰소리치기, 반향 없는 메아리에 그쳐선 안 된다. 앞으로 제국주의 발언의 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하면서 치밀한 주변국 관리외교를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제성호 (중앙대 교수·법학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5. 9. 1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