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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보다 더 극적인 '실제상황' - 조희문
	2005-07-25
영화보다 더 극적인 '실제상황'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는지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사실감을 극도로 높인 영화를 보면서 치밀한 상상력에 놀라워하다가 더 극적인 ‘실제상황’과 마주치면 각본없는 연출이 얼마나 생생한 충격으로 다가오는지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비행기를 몰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향해 돌진하자 거대한 두 개의 건물이 마술처럼 무너져 내렸을 때 경악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트로 연출한다 하더라도 얻기 어려운 정교함과 극적인 스펙터클의 생생함은 피해자 측은 물론 그것을 시도한 쪽에서조차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내 한 대기업 간부와 언론사 대표의 은밀한 대화 내용을 비밀스럽게 녹음한 이른바 ‘X파일’ 사건 역시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도청 작업을 벌인 인물들이 국가정보기관의 전문요원들이라는 점이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의미로든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이며 ‘작업의 대상’이 여야의 최고위 정치인·법조·언론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미션 임파서블’(1996)은 정보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작전을 펴는 미국 정보기관 비밀요원들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필요한 정보가 있는 곳이라면 변장 또는 위장으로 신분을 감추고 목표물에 접근하며 최첨단 장비로 도청·감청·촬영·복사·전송을 한다. 지휘부에서는 그렇게 모은 정보를 이용해 목표물을 제거하거나 협상, 거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비밀스럽게 진행되던 임무는 조직 내부에서 배신자가 암약하는 바람에 일대 혼란에 빠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또 다른 작전이 동원된다는 내용이다. 흑백 텔레비전 시절에 ‘제5전선’이란 제목으로 인기를 얻었던 시리즈를 다시 각색한 경우이지만 세월이 지나도 비밀스럽게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보 수집 기술의 정교함보다 더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영화 속 등장인물 누구도 자신이 목숨을 걸고 모은 정보가 최종적으로 무슨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명령에 따라 그것을 모으고 또 다른 부서에서는 그것을 분석하고 가공하며 다른 과정에서는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것인지를 판단한다. 공익적인 용도로 쓸 수도 있고 사적인 거래나 협상의 수단으로 변질할 수도 있다. 때로는 조직 자체를 협박하거나 와해시키는 수단 노릇을 하기도 한다. 이른바 ‘X파일’로 불리는 이번 도청 사건은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 곳곳을 불법을 동원하면서까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모은 정보가 위협과 협박, 음험한 거래의 수단으로 동원됐을 것이란 개연성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테러’나 다름없다. 어디에서 누군가는 특정 대상의 치명적인 정보를 쥐고 있으며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악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온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이 질서를 만드는 동물의 세계라면 모를까, 정당한 절차와 합의, 신뢰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민주사회에서 음모와 전략이 난무하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일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이 음모와 거래의 수단으로 정보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존립을 뿌리째 흔드는 행위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또는 집단)이 얻은 결과가 정당한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며, 과연 존중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도 어디선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영화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다시 돌릴 수 없다. 언제까지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어야 하는가?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 교수·영화학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5. 7. 25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