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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화보다 '善'進化를 - 김진현
	2005-03-09
선진화보다 '善'進化를 선진화(先進化)란 말은 이제 소구력(訴求力)이 없는 말이다. 해방 후 한국에서의 국정 표어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독립-반공-통일-부흥(건설)-근대화-민주화-세계화이다. 1960년대까지의 독립-반공-부흥을 빼면, 근대화-민주화-세계화-선진화 모두 근대화의 연장·확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선진화도 이 점에서는 근대화란 말의 동의 반복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이렇게 진부한 용어를 쓰고도 박수를 받는 것은 선진화란 표현에 새삼 감동해서가 아닐 것이다. 박정희식 근대화 이래의 구도, 경제 제일주의적 접근법에서 확실히 일탈하는 듯 보였던 그에게서 ‘선진화’ 구호나 ‘소득 2만달러 조기 달성’ 같은 숫자를 들으며 궤도 ‘회복’ 같은 위안을 받은 때문일 것이다(특히 재계가). 글자로만 보면 ‘소유자 사회’ ‘제3의 길’ ‘사회주의 조화사회(和諧社會)’ 따위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어느덧 경제 제일주의, 경제 환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는지, 소득(GNP)과 성장의 목표 지상(至上)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선진화란 구호에 여야가 서로 로열티(royalty) 덕담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 한국식 정치 안정화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라 할까. 그러나 1960년대 이래 경제결정론, 경제만능 사고방식의 과잉지배에서 이제 해방될 때가 되었다.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 논의에서 가장 큰 맹점은, 그것이 국가 종합안보 전략에서 발상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기능 일변도의 접근이라는 데 있다. 흔히 유럽연합(EU)을 마치 경제공동체의 성공으로 보지만 그 원천과 기반은 세 번의 대전을 겪은 독일과 프랑스가 더 이상 전쟁과 적대를 하지 말자는 정치적 결의가 선행된 것이고, 구체적 행동으로 무기를 만드는 재료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하는 것이었다. EU는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지금도, 정치와 안보에 기반한 경제공동체이다. 우리나라를 풍미하는 강소국(强小國) 논의 역시 경제결정론의 백미이다. 아일랜드·네덜란드·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이면서도 소득이 높은 나라들을 목표로 하는 강소국론은 마치 안보는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의 공통점은 인구가 적고 경제가 서비스나 첨단기술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안보 비용이 현저히 낮다는 데 있다. 다만 우리가 이들에게서 꼭 배워야 할 점은 전 국민 개개인 수준까지 침투한 언어와 능력의 세계화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이들 강소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안보 환경에 있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라는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유일한 나라이고, 이 네 나라와 더불어 살고, 겨루며 살아야 하는, 안보·외교 비용이 비상히 높을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모델은 아일랜드·네덜란드·싱가포르가 아니라 스위스여야 한다. 성인 전부가 예비군이고 전 국민을 핵전쟁에서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철저하게 ‘세계화의 세계 중심지’인 스위스. 국내에는 반드시 세계 1등하는 것만 남기는 경쟁력과, 세계 평화와 신뢰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도덕적 가치의 발상과 실천이다. ‘부상한 병사는 적군의 병사라도 치료해 주자’는 인류 보편의 사랑을 제도화, 상징화, 조직화한 적십자운동이 있음으로써 국력과 국격(國格)을 상승작용시켜 스위스의 평화와 번영이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 정치적 신뢰가 높으면서 경제력이 뒷받침될 때 진정한 선진국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화라기보다 ‘선’진화(‘善’ 進化)여야 한다. 인간이라는 개체건, 국가나 사회라는 조직이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의 안전과 평화이며, 경제는 안전과 평화를 만들고 지키는 데 필요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라는 가치의 정상화가 시급하다. 김진현 (세계평화포럼이사장 / 시민회의 고문) 출처 - 조선일보 2005. 3. 9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