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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정략에 이용 말라 - 박효종
	2005-01-24
역사를 정략에 이용 말라 요즈음 한일협정에 관한 문서들이 공개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쟁점이 발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가 시급한 정치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성숙한 정치적 감각과 인권의식, 그리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화된 시각으로 보면, 과거 3공화국 정부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도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은 과거의 기록과 역사를 미래에 대한 뼈아픈 교훈으로 반추하기보다 현실 정치에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문서 공개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득이 되고 실이 되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왜 과거의 문서와 기록을 공개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새롭게 반추함으로써 잘못된 것이 있다면, 미래에는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공동체 전체가 ‘집단적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물론 어떤 국정 사안이든 이해 당사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누가 이익을 보았는지, 손실을 보았는지가 드러난다. 또 정부의 잘잘못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잘못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도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 정부가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껏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의 것을 지금의 잣대로 가늠하며 정치적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것은 정치의 정도가 아니라 정략 정치의 산물이다. 과거를 끊임없이 현 정치 상황의 이해득실에 맞추어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삼국지’를 보면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민주정치의 ‘부실함’을 말하는 것이지 ‘원숙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과거를 기억하는 동물이다. 소도 ‘되새김질’을 하지만, 이 ‘되새김질’은 생물학적인 되새김질에 불과하다. 인간만이 지적인 되새김질을 할 수 있다. 또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되새김질을 할 수 있어야 그 정치공동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일기에는 많은 성취 못지않게 많은 회한을 담았다. 왜 일기를 썼는가. 그것은 회한을 거울삼아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로마인들이 숭상해 마지않았던 신 가운데 ‘야누스’가 있었다. 이 ‘야누스’는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보면서 또 다른 눈으로는 미래를 바라보는 신이었다.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연결하려고 한다면, ‘집단적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특히 과거를 가지고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정략적 사고는 죽은 동물을 가지고 뜯어먹으려고 하는 하이에나 속성과 다를 바 없다. 앞으로 현대사의 많은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그 가운데는 가슴아픈 사연도 많을 것이고 통한의 ‘국가적 실패’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공개될 때마다 우리 사회가 차분하게 그 의미를 반추하지 못하고 한바탕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한다면, 우리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제정러시아가 차르시대에 알래스카주를 정말로 헐값에 미국에 팔았다. 미국에서도 알래스카를 구입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장관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당시에 알래스카는 쓸모없는 주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러시아로서는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미국의 알래스카주와 관련하여 재협상을 벌이자고 제안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과거 정부의 실패를 보면서 미래의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현재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 이용해서는 안 된다. 박효종 (서울대교수.국민윤리교육학 / 시민회의 공동대표) 출처 - 세계일보 2005. 1. 22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