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FTA 빨리 비준을
2003-11-12
한·칠레 FTA 빨리 비준을 지난해 10월에 타결된 한국과 칠레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올해 초 양국 정상간에 정식으로 서명된 이후, 이제 우리 국회의 비준 동의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내년 총선과 맞물린 정치권의 이해 관계로 협정에 대한 국회 통과 여부는 불투명한 실정이다. 특히, 농민 단체들이 비준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으며, 표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원들까지 이에 가세하고 있다. 선택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의회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과연 이번 협정이 선택의 문제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인 자유무역주의는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협정은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자유무역주의 체제로 들어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은 한-칠레 FTA가 국회를 통과할 경우 자신들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논리로 한국 경제에 있어서도 이번 협정을 시작으로 신속하게 세계 무역 질서에 편입하지 못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한-칠레 FTA 비준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와 FTA를 추진하고 있거나 계획중인 국가들은 우리 정부의 대표성에 신뢰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극단적으로 한국은 단 한 건의 FTA 협정도 체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한국의 경쟁국들은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우리의 주요 수출 품목들이 제3국에서 이들 국가의 제품들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가까운 시일 안에 세계 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은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비준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대로 우리 정부가 FTA를 거부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 농업이 보호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탈농 현상은 지속될 것이며, 농가 부채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농산물 시장 개방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시기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미래의 성장 잠재력 또한 비관적이기 때문에,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한국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도 못하고 저성장 체제가 고착화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무역의존도가 높은 경제에 있어서, 수출의 침체는 곧 경제 전반의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 무역 질서에서 배제되는 데 따른 해외 시장의 축소와 제한적인 내수 시장 규모는 필연적으로 장기 불황을 가져올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FTA로 대변되는 새로운 무역 질서에 대한 수용이 선택의 문제인지, 아니면 생존의 문제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만 이번 한-칠레 협정과 향후 이어질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협정 결과, 주된 피해자가 농민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국 경제의 생존과 농민의 생존이 상충되는 점도 분명하다. 정부는 칠레와 우리나라가 각각 남반구와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과수·채소 농가의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칠레가 체결한 다른 FTA와 예외 범위를 비교해 보아도 많은 예외 품목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앞으로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들과도 FTA가 추진될 것이며, 이번 협정에서 운좋게 예외 품목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예상되는 많은 FTA에서 똑같은 행운이 반드시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번 FTA협정으로부터 발생하는 농민들의 피해를 보전할 수 있는 특별법과 추가적인 지원 대책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부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면, 한국 경제의 생존권이 중요한 만큼 희생을 강요받은 계층의 생존권도 똑같은 가치로 존중돼야 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농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부의 비전이 필요하다. 경쟁력이 있는 부문을 육성하고 농가 소득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 정책이 없는 한, 이와 같은 사회 내부의 갈등은 더욱 증폭돼 갈 것이다. 농민과 한국 경제가 모두에 이익이 되는 상생(相生)의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한-칠레 FTA 비준이 부결될 경우, 그 어느 쪽에도 이익이 되지 못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기분석팀장) 출처 - 문화일보 2003. 11. 12 포럼